정태인/새사연 원장
'스웨덴 모델은 왜 실패했는가?’
스웨덴 복지정책의 초석인 ‘렌 마이드너 플랜’으로 잘 알려진 마이드너가 비통한 마음으로 위 제목으로 글을 쓴 때는 1993년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내내 인플레이션의 문제를 노정하던 스웨덴은 1991년 통화위기를 맞았다. 1984년에서 94년까지 미국의 1인당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3.0% 증가한 반면 스웨덴은 1.4% 증가에 머물렀다. ‘스웨덴 병’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미국과 스웨덴의 주류경제학자들은 앞다퉈 ‘복지국가의 사망’을 선언했다. 그들에 따르면 스웨덴 등 북유럽의 평등주의와 그 결과물인 ‘지나친 복지’가 노동자들이 일할 유인을 없애고 도덕적 해이에 물들게 했으니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웨덴은 95년부터 2007년까지 연평균 3.1% 성장해서 미국의 2.8%보다 높은 성장률을 거둠으로써 부활하게 된다. 임금격차 등 각종 평등 지표에서 스웨덴은 여전히 수위를 달리는 반면 미국은 선진국 중 최하위권이다.
그렇다면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스웨덴의 자본자유화와 금융자유화(특히 85년의 대출상한규제 철폐), 그리고 조세개혁(특히 91년 이자에 대한 조세감면)은 전반적 인플레이션을 넘어 폭발적인 거품경제를 불러일으켰다. 수출대기업을 위한 평가절하 정책에 따라 수출·내수부문 간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수출분야의 남아도는 돈이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더 쏠리게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외국 자본(외자)이 빠져 나가면 바로 외환위기이다. 변동환율제 하에서 외자를 붙잡기 위해 이자율을 무려 500%까지 올렸어도 이 상황을 막지는 못했다.
스웨덴이 다시 살아난 것은 1997년 분권화된 중앙임금교섭이 부활되고, 여전히 GDP의 25%를 차지하는 전통의 보편적 사회서비스(교육, 보육, 의료)가 복지와 고용을 동시에 지지했기 때문이다. 협력과 창의성을 살리는 교육, 성 평등정책에 의한 높은 고용률,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 또 한 번의 산업구조조정을 성공시켰다.
요컨대 위기의 원인은 거시정책이었고 동시에 노동자 연대의 붕괴였다. 사회 양극화를 가져오는 거시 정책을 쓰면서 복지를 유지하거나 확대한다는 것은 스웨덴에서조차 불가능했다.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이유(자본자유화와 금융규제 완화)로 경제위기를 맞았던 노르웨이와 핀란드의 부활 역시 동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
아메리카 복지국가 캐나다의 비극
이 땅에서 정말 살기 힘들어 이민을 택하고자 할 때 우리 국민의 머리에 떠오르는 제 1순위 나라 중 하나가 캐나다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캐나다는 1989년에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고 1994년에는 이 협정을 확대해서 멕시코까지 포함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발효시켰다.
과연 당시 세 나라 정부의 주장대로 성장률이 높아지고 그 결과 복지도 확대되었을까. 지난 20여년간 지니계수로 측정되는 소득 양극화 현상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멕시코, 그리고 3~4위를 고수하고 있는 미국은 아예 검토 대상도 아니다. 아메리카의 유럽, 캐나다는 15년 동안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다행히도 캐나다는 2008년 금융위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캐나다 은행은 왕립은행의 전통에 따라 일반적인 예금 및 대출 업무에 종사했고 파생상품을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바젤II보다도 더 강한 자본규제와 유동성 규제에 따라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주택가격의 버블도 존재하지 않았다. 개방과 민영화, 규제완화에 적극적이었던 멕시코가 2009년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자본 및 금융시장의 건전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캐나다 사례는 다시 한번 웅변하고 있다.
그러나 캐나다의 경제성장, 고용, 그리고 실질임금은 NAFTA의 약속과 달리 지난 15년간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1990년부터 2009년까지 20년 동안 경제성장률은 연 평균 2.25%(1인당 GDP는 1.2%) 정도로 자유무역협정을 맺기 전인 80년대의 3%에 비해 오히려 떨어졌다. 실질임금은 96년에서 2006년까지 10년 동안 고작 4%가량 증가했으며, 캐나다 정부가 NAFTA를 맺으면 따라잡을 거라고 장담했던 미국과의 생산성 격차는 오히려 증가했다. 전 산업 부문의 생산성이 1% 이상 증가해서 매년 5% 이상의 추가 성장이 일어날 거라는 한국 정부의 주장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반대하는 멕시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 DB)
그 결과 2000년대 10년간의 중간 지점에서 지니계수로 측정한 소득불평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나쁜 쪽에서 13위를 차지했다. OECD 평균은 물론, 놀랍게도 14위를 차지한 한국보다도 캐나다의 불평등지수가 더 높았다. 1990년대 초반 이래 OECD 국가 중 거의 유일하게 캐나다의 GDP에서 차지하는 공공사회지출의 비율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NAFTA 이후 캐나다 정부는 ‘노동복지’(workfare), ‘의무국가’(duty state), ‘사회투자국가’ 등의 구호를 내세워 노동의 의무를 강조하며 복지를 축소했다. 특히 실업급여 제도에서 수급자격의 강화, 급여의 축소, 수급기간의 단축을 통해 현격한 후퇴가 일어났다. 앞에서 본 스웨덴 비판의 핵심인 복지병을 치유하기 위한 정책을 실제로 수행한 것이다.
클락슨 등 캐나다 학자들의 주장대로 NAFTA는 외부헌법, 또는 초헌법의 역할을 했다. 일반적인 복지정책, 특히 공공성 강화정책은 나프타의 여러 독소조항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특히 투자자-국가 제소권(ISD)은 캐나다의 공공정책을 가로막는 핵심 역할을 했다. 1994년에서 2010년 7월까지 캐나다는 알려진 것만 해도 28건의 제소를 당했다. 한국 정부가 강조하는 예외조항이 NAFTA에도 유사하게 존재하지만 자연자원 관련 10건, 환경보호 7건, 심지어 우편서비스 2건 등 핵심적인 공공정책이 그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소송이 진행된 사건보다 돈을 주고 타협한 사건이 더 많을 것이고 소송을 우려한 공무원들이 지레 포기한 정책 또한 숱하게 많을 것이다.
한국이나 멕시코처럼 복지제도가 거의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강력한 양극화 세력, 즉 시장만능주의를 신봉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면 FTA의 위력은 배가된다. 멕시코의 전화나 철도 민영화의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미국 금융위기의 엄청난 폐해를 보면서도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는 물에 들어가야 한다”(박병원 전 경제수석)며 여전히 메가뱅크-투자은행을 추진하는 대통령 측근이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경제위기 때문에 주춤하고 있지만 물 민영화, 가스 및 철도 민영화, 특히 의료민영화를 여전히 호시탐탐 노리는 곳에서 거대 경제권과의 FTA는 복지 확대는커녕 복지 축소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다. 협상에서 미래유보로 빠졌다고 하더라도 자발적 민영화와 FTA가 결합하면 ISD의 대상이 됨으로써 어떤 비극이 발생해도 되돌아갈 길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이 복지국가 되려면
스웨덴이나 캐나다에 비한다면 복지에 관해서 우리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에 불과하다. 연부역강한 청장년의 경우에도 금융규제 완화와 투기, 그리고 시장주의 정책기조를 따랐을 경우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지난 15년간 지속된 양극화 시대에 우리 국민의 의식을 사로 잡은 구호는 “부자 되세요”라든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따위였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심각한 양극화 속에서 “나와 내 아이만은 승리할 수 있다”는 미몽에서 깨어나 비로소 다 함께 사는 길, 즉 복지를 요구하게 되었다. 지난 2008년의 총선과 지난해의 6·2 지방선거를 비교해 보면 가히 상전벽해라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지난 15년 동안의 정책기조를 유지하는 한, 복지국가는 험난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미국식 FTA를 맺고, 자발적인 민영화와 규제완화를 함으로써 양극화를 촉진하면서 복지로 그 구멍을 메운다는 것은 4대강 사업을 하면서 홍수방지책을 만드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이런 상황에서 복지만 늘리면 필경 재정이 악화되어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적반하장의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 홍콩 시민이 '재벌의 고기 사발'과 '빈민의 밥 사발'을 들어보이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 DB)
당장 부동산투기와 사교육 등 투기를 근절해야 하고 금융거래세를 부과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양극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양극화, 학력과 성에 따른 양극화를 시정하는 정책을 동시에 시행해야 한다. 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자본이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새로운 금융거시건전성 규제를 도입하는 것도 필수적인 일이다. 한마디로 기존의 경제정책기조를 확 바꿔야만 복지동맹이 승리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을 꾸준히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우리 아이들 대에 이르면 아시아의 모범적인 복지국가라는 영예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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