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현주의 굿 비즈니스, 굿 머니]‘더 불어난 돈’이 ‘더 나은 세상’에 보탬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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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제칼럼

[제현주의 굿 비즈니스, 굿 머니]‘더 불어난 돈’이 ‘더 나은 세상’에 보탬 되길

by eKHonomy 2019. 6. 7.

작년 10월 멀린다 게이츠가 출연한 ‘노 리미츠(No Limits)’라는 팟캐스트를 듣다가 마음에 박힌 이야기가 있었다. 진행자 레베카 자비스가 던진 질문이었다. 팟캐스트가 아니라 책을 통해 만났다면, 굵은 밑줄을 긋고 옆에 별표를 치고 싶었을 문장이었다. “당신이 멀린다 게이츠라는 사실, 그 이름에서 오는 힘을 생각할 때, 지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그 책임감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나요?” 


블루헤븐 홈페이지


방송 내내 거침없이 답을 하던 멀린다에게 처음으로 망설임의 기운이 느껴졌다. 문장을 이루지 못하는 단어 몇 개를 웅얼거린 뒤에야 이어진 대답은 겸허하고도 단호했다. “시간을 들여 이름에 맞춰 성장해 간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에게도 꽤 시간이 걸린 일이었죠. 나는 오로지 행운이 따라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빌과 사랑에 빠졌고, 그도 날 사랑했고, 그래서 결혼하게 되었을 뿐이죠. 어쨌든 이런 자리에 있다면 내가 만나온 여성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자신에게 목소리가 없다고(voiceless) 느끼는 여성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가족 안에서 또 속한 공동체에서요. 전 세계적 무대에서는 당연하고요.”


멀린다는 세계 최고의 거부 빌 게이츠의 부인이자, 세계 최대의 민간재단인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게이츠재단)의 공동대표다. 빌의 재산은 1000억달러가 넘었다고 하고, 게이츠재단의 기금은 500억달러가 넘는다. 전 세계 국가 중 정부 예산이 1000억달러가 넘는 나라는 30여개국에 불과하고, 500억달러가 넘는 나라도 60개국이 채 되지 않는다. 멀린다가 빌과의 관계를 통해 갖게 된 엄청난 영향력의 크기를 짐작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그런 멀린다에게 던져진 이 질문은 순전한 질문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의 영향력이라면 막중한 책임감을 느낄 것이 당연하고, 그 책임감은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받아들여야만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기도 했다. 부에 따르는 특권에 대한 선망보다는 책임감의 무게에 대한 경외가 앞서는 이 질문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신선한 질문 뒤에 이어진, 겸허하지만 뒤로 빼지도 않는 멀린다의 답변도 기억에 남았다.


지난달에는 ‘리턴스 온 인베스트먼트(Returns on Investment)’라는 임팩트 투자 분야의 다양한 소식과 인물을 소개하는 팟캐스트에 또 다른 거부가 출연했다. 블루헤븐이니셔티브(블루헤븐)라는 패밀리오피스를 이끄는 리젤 프리츠커 시먼스였다. 리젤은 하이엇호텔 체인의 소유주이자 마몬그룹을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에 매각한 초거부 프리츠커 패밀리의 일원으로, 2012년 자신과 남편만의 재산으로 독립적인 패밀리오피스 블루헤븐을 설립했다(패밀리오피스는 가족이 소유한 재산을 투자하고 관리하는 기구를 일컫는다. 미국의 패밀리오피스들이 운용하는 자산은 총 1조7000억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임팩트 투자 분야의 오피니언 리더이기도 한 리젤은 팟캐스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와 남편은 상속자들이고, 제가 관리하는 돈은 제가 번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돈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알고,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때 이 돈이 최대한 긍정적인 임팩트를 일으키게끔 하려고 노력합니다.” 


블루헤븐은 자선재단이 아니다. 리젤은 자신들의 투자가 “이익과 목적을 함께 추구한다(for profit and with purpose)”고 말한다. 그에게 임팩트 투자는 “더 많이 알고 하는(more informed) 투자”다. 돈이 투자라는 프로세스를 거쳐 세상 이곳저곳에서 쓰일 때, 그 돈이 결국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영향을 일으키는지 제대로 인지하고 집행하는 투자라는 뜻이다. 더 많이 안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자신의 선택 아래 둔다는 의미다. 돈이 일으키는 사회적 임팩트를 이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투자가 내포한 리스크를 더 잘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블루헤븐은 자산 전체에 임팩트 투자의 원칙을 적용하지만, 자선활동을 위한 자산과 투자를 위한 자산을 뚜렷하게 분리하고 있다. 돈을 벌면서도 추구할 수 있는 사회적 목적이 있고, 돈을 벌지 못해도 추구해야 하는 사회적 목적이 있다는 사실이 이 뚜렷한 분리 안에 전제되어 있다. 큰돈과 그에 따르는 영향력을 가진 리젤은 두 가지 목적을 모두, 그러나 나누어 추구한다.


리젤은 자신에게 온 돈을 스스로 벌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객관적 관리인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엄중하게 받아들인다. 엄중한 책임을 지닌 관리인으로서 리젤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하는 것이 ‘더 불어난 돈’만이 아니라 ‘더 나아진 세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리젤의 이런 명석한 인지 덕에 블루헤븐의 투자활동은 돈이 불어나는 일과 세상이 나아지는 데 기여하는 일이 반드시 따로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로 작동하고 있다. 


벌었든 물려받았든, 큰돈에는 자연스럽게 큰 영향력이 따른다. 그러나 큰 영향력이 곧바로 리더십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주어진 영향력을 얼마나 주체적으로 인식하며, 얼마나 의도적으로 활용하느냐가 리더십의 필수조건일 것이다. 사회 안에서 좋은 리더십을 발휘하는 역량은 큰돈을 어떻게 갖게 되었느냐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큰돈을 갖게 되었다면, 분명히 어떤 행운의 요소가 작동한 덕이다. 빌 게이츠와 결혼했기 때문이라거나 프리츠커 패밀리의 딸로 때어났기 때문이라는 식의 노골적인 행운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시대가 맞물려 주어진 기회나 사회가 쌓아온 물적, 정신적 인프라에서 따로 떨어져 큰돈을 일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겸허함, 그리고 영향력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감임을 인식하는 지적이고도 정신적인 역량이 만날 때, 빅머니는 굿머니가 된다.


<제현주 임팩트 투자사 옐로우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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