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된 85호 크레인이 묻는다
본문 바로가기
온라인 경제칼럼

해체된 85호 크레인이 묻는다

by eKHonomy 2012. 1. 26.
 강신준 | 동아대 교수·경제학 

이상하게도 그 사건은 보도되지 않았다. 희망버스에 실렸던 높은 사회적 관심에 비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더 이상 거기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 김진숙 지도위원이 농성을 벌였던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 얘기이다. 우리 사회의 ‘희망’을 불러 모았던 그 크레인은 이제 더 이상 그 자리에 없다. 농성자들이 내려오는 순간 곧바로 자잘한 쇳조각으로 해체되어 고철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회사 쪽에서 본다면 다시는 기억에서 떠오르지 않도록 흔적조차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역사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많았다. 하나만 떠올려 보자. 기원전 146년 로마는 오랜 숙적이었던 카르타고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로마군의 지휘자 아이밀리아누스에게 내려진 원로원의 명령은 85호 크레인의 운명을 닮은 것이었다. 성벽을 포함하여 카르타고 도시 전체를 단 하나의 벽돌까지 형체가 남지 않도록 철저하게 부수라는 것이었다. 700년 동안 지중해의 패자였던 카르타고는 그렇게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로부터 600년 후 로마도 카르타고의 뒤를 그대로 밟으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로마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카르타고가 아니라 역사의 방향이었던 것이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내려오며 웃어보이고 있다. l 출처 : 경향DB

 
85호 크레인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없앤다고 희망버스가 다시는 오지 않을까? 아니다, 희망버스는 현재의 경제구조가 만들어낸 모순과 그것이 흘러가는 역사적 방향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그 모순이 역사적 방향에 맞게 해소되지 않는다면 크레인과 희망버스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크레인의 해체에 집착한 경영진의 생각은 참으로 무망해 보인다. 그런데 이 얘기가 경영진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한진중공업에서는 얼마 전 새로운 노조가 설립되어 기존 조합원의 과반수를 확보함으로써 희망버스에 힘입어 구성된 노조는 교섭권을 잃게 되었다. 새로 발효된 노동법의 복수노조 조항 때문이다.

그래서 크레인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300일이 넘는 초인적인 농성과 희망버스라는 초유의 사회적 사건은 한낱 연기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는 점이다. 문제의 복수노조 조항은 1997년에 개정된 노동법이 유예되어 있다가 발효된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15년의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우리 노동진영은 무엇을 준비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민주노총의 한 간부가 자조적으로 표현하였듯이 우리 노동운동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현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모순을 외면하고 눈앞의 크레인을 해체하여 해결책을 찾으려는 단견의 경영진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애초 목숨을 건 농성을 불렀던 정리해고는 경영주의 ‘일방적인 선의’에만 기댈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일반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고 따라서 사회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해결할 문제다. 당연히 사회적 합의과정이 필요하고 그것은 목표를 잃지 않고 지속적인 노력을 추진하는 조직과 세력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조직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한진중공업의 안타까운 사정은 우리에게 반성의 계기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경영진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에 눈을 돌리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고 특히 노동진영은 노동문제의 근본 원인과 관련된 장기적 과제를 설정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조직으로 탈바꿈해야만 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일상적으로 만들어내는 정리해고마다 목숨 건 농성과 희망버스를 고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가 이미 사반세기를 채우고 있는데 가장 일상적인 노동문제인 정리해고에 대해 아직도 개인의 농성이라는 수단밖에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참혹한 일이 아닌가? 농성자들을 내려보내고 고철로 해체되던 순간 85호 크레인은 자신의 운명을 방치한 우리 노동운동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쇳덩이라고 영혼이 없었을까? 거기가 한 노동자의 무덤이었는데도?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