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한은 빼고 ‘물가 잡아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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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제칼럼

[경향의 눈]한은 빼고 ‘물가 잡아라’ 4년

by eKHonomy 2012. 1. 10.

서배원|논설위원 


연초부터 이명박 대통령이 물가잡기에 비상을 걸고 나섰다. 지난 2일 신년사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올해 소비자물가를 3%대 초반에서 잡겠다”고 선언하더니, 다음날에는 물가관리 실명제를 지시했다. 주요 농축산물의 관리 담당자를 정해 물가를 책임지게 하라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5일 국방부 업무보고 때도 “물가안정과 일자리 창출 등 서민경제를 위해 튼튼한 안보가 최우선”이라며 물가안정을 강조했다.

이쯤 되면 이 대통령의 머릿속은 온통 물가 걱정으로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올해는 물가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안도감은 전혀 들지 않는다.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내가 직접 물가 챙기겠다’고 다짐하고, ‘물가 잡아라’며 장관을 다그친 일이 한두 번인가. 생각이 물가관리 실명제에 이르면 황당해할 공무원 얼굴부터 떠오른다.

 
이 대통령의 물가와의 전쟁은 정권 출범 때부터 시작됐다. 이 대통령은 2008년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물가관리가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비서관 회의에서는 “라면값 100원 오르면 서민들에게 큰 부담”이라며 서민의 물가고통을 각별히 챙기는 모습도 보여줬다. 이른바 ‘MB물가지수’가 등장했고, ‘주유소 기름값이 묘하다’ ‘성장보다 물가안정이 최우선’ 등 수많은 ‘물가 어록’을 탄생시켰다.

결과는 실패의 연속. 52개 품목의 MB물가는 평균 물가 상승률을 훌쩍 뛰어넘어 실패작으로 판명났고 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 등을 앞세운 팔목 비틀기식 물가대책도 별 효과 없이 흐지부지됐다. 2008년 소비자물가는 4.7%로 전년의 2배에 이르렀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부분 나라의 물가가 안정됐던 2009년에도 2.9% 뛰었다. 2010년 물가 역시 10% 넘는 성장률을 보인 중국과 비슷한 2.8%가 올랐고, 지난해에는 4.0%(종전 지수 기준 4.4%)를 기록했다. 

대통령이 물가가 최우선 과제라며 물가 잡으라고 그리도 다그쳤는데 고물가 행진은 계속 중이니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불신은 커질 수밖에 없다. 물가잡기 능력에 대한 불신이 거듭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물가안정 의지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게 마련이다.

고물가의 원인은 원자재값 상승, 농축산물 파동 등 다양하지만 물가관리에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저금리·고환율 정책이다. 물가가 최우선 과제라면서도 거시정책은 물가를 자극하는 쪽으로 전개한 것이다.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계속 초저금리를 유지해 물가 상승압력을 키웠다. 수입물가 급등을 무릅쓰고 수출 지원을 위한 고환율 정책을 폈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l 출처 : 경향DB



물가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해온 이 대통령이 금리정책의 문제를 지적한 적은 없다. 물가안정을 책임진 기관은 지식경제부나 공정위가 아니라 한국은행이지만 이 대통령은 한은에 물가안정에 더 힘쓰도록 주문하거나 물가관리 실패를 나무란 적도 없다. 여론의 화살은 뒷북치기 금리인상으로 물가관리에 실패한 한은에 쏠리는데 이 대통령은 물가 잡으라고 각료들만 다그쳤을 뿐이다. 고환율로 인한 수입물가 급등 문제도 언급하지 않았다. 저금리·고환율의 거시정책 기조에 문제가 없다는 이 대통령의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결국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물가를 희생한 것은 이 대통령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얘기다. 김중수 한은 총재는 이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성장보다 물가가 중요하다’고 외칠 때 대통령의 속뜻은 여전히 물가보다 성장에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충실하게 받들어온 셈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3월 국민경제대책회의에서 “물가 문제는 우리가 최선을 다하더라도 ‘비욘드 컨트롤(beyond control)’이 되지 않는가 하는 그런 부분도 있다”며 묘수가 없다는 입장을 밝혀 비난을 산 적이 있다. 이 대통령이 물가의 불가항력 측면을 언급한 것은 책임회피 의도뿐 아니라 물가에 대한 인식의 일단도 드러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물가상승 막겠다고 금리를 올릴 경우 물가는 못 잡고 경기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거시정책은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물가는 행정력으로 잡아보겠다는 인식이 굳게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과 정부의 물가안정 의지를 시장이 신뢰하지 못하면 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커진다. 합리적 이유 없이 너도나도 집세 올리고 물건값 인상하는 등 물가상승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인플레 기대심리는 이미 높은 수준에 있다. 그런 와중에 정부는 상반기 중 경기둔화에 대비한 조기 재정집행을 예고하고 있다. 저금리에 돈 풀면서 물가는 반드시 잡겠다니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어쨌거나 이 대통령이 “물가는 공직을 걸고 챙겨야 한다”고 했으니 공무원들 한숨만 늘게 생겼다. 이 판에 정작 물가관리 실패에 책임져야 할 한은 총재는 반성은커녕 물가관리의 어려움을 국민에게 적극 알려야 한다며 커뮤니케이션 전담조직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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