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관철의 경제 단상]재벌 3세여, 클러치 능력을 키워라
본문 바로가기
온라인 경제칼럼

[오관철의 경제 단상]재벌 3세여, 클러치 능력을 키워라

by eKHonomy 2019. 5. 2.

스포츠 경기에서 승패가 갈릴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을 ‘클러치(Clutch) 상황’이라 부른다. 미 프로농구(NBA) 스타였던 레지 밀러는 클러치 상황에서 3점슛을 성공시켜 경기 흐름을 뒤집는 것으로 유명했다. 1995년 5월8일 뉴욕 닉스와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8.9초 동안 8점을 몰아넣으며 대역전극을 만들었고, 이후 밀러가 4쿼터에 펄펄 나는 모습을 두고 사람들은 ‘밀러 타임’이라 불렀다. 축구 등 다른 경기에서도 고비에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선수들이 스타 대접을 받는다.


기업가들도 마찬가지다. 승부수를 던지고 성공해야 비로소 혁신적 기업가로 평가받게 된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현대자동차 정의선 총괄부회장은 자신들이 클러치 상황에 내몰리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다. 두 사람을 우선 거론하는 것은 한국의 대표기업임과 동시에 한국경제의 IT·자동차산업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1일로 삼성 총수에 오른 지 1년을 맞는 이 부회장은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육성과 스마트폰 사업의 혁신을 이끌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압도적 우위를 누려온 삼성전자가 최근 시스템반도체에 133조원 투자계획을 밝힌 것은 중국 업체들의 무서운 추격과 기술적 한계에 직면할 수 있는 메모리 반도체를 넘어서려는 이 부회장의 승부수로 보여진다. 반도체 사업은 타이밍과의 싸움이고, 그가 클러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부품연구동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 행사를 마치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극자외선동 건설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문 대통령은 선포식에서 “우리의 목표는 분명하다”며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유지하고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분야 세계 1위를 달성해 종합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부회장은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며 “앞으로 사람과 기술에 대한 투자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삼성전자 국내 사업장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자동차산업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닥칠 분야로 꼽힌다. 재계 관계자는 “중국시장에서 현대차가 부진한 게 사드 탓이 아니다. 중국 업체들의 기술 수준이 올라왔기 때문”이라며 “정 부회장이 어떻게 현대차를 이끌고 갈지 정말 궁금하다”고 말했다. LG그룹 구광모 회장, 한진그룹 조원태 회장 등도 시험대에 올랐으며 중견그룹으로 범위를 넓히면 향후 수년간 경영 전면에 나설 재벌 3세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스포츠 경기에서 클러치 상황에 강한 승부사가 한순간 우연히 만들어질 수 없듯이 기업가들도 마찬가지다. 쉼 없는 자기 계발과 절제, 소통의 미덕이 구비되어야 한다.


한 재벌 3세는 쏘울 경차를 타고 회사로 출근하며 구내식당에서 종종 아침을 먹을 정도로 소탈하다. 반면 다른 재벌 3세는 불편한 소리를 참지 못하며 외부 인사들과의 만남에서도 쓴소리에 격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개인적 성향은 집안 가풍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온전하지 못한 성품으로 기업 이미지에 미치는 악영향이 누적되면 파장은 예상외로 커진다. 철없는 재벌 3세라느니, 밥상머리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세간의 평은 오너리스크를 부르고 결정적인 순간 그들을 옥죌 수밖에 없다. 여전히 경영승계를 보는 사회의 시선은 매섭고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요 의사결정자가 된 거 아니냐는 의혹이 따라다닌다. 이런 고리를 끊어야 위기 시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


정부 산업정책에 오래 몸담았던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 차관은 자신의 저서 <한중일 경제삼국지2>에서 “오너경영 시스템은 신속하고 선제적 투자 결정을 가능케 하는 한국경제 시스템의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었지만 객관적 상황과 과학적 전망을 무시한 독단적 의사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를 수 있다”며 “복잡다단해지는 글로벌 경영환경에서 상속 오너의 결정권에만 의존하는 지배구조는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변화를 두려워하며 오너경영에 찬사만 늘어놓는 측근들을 멀리하고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을 중용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재벌 3세들에게는 공정경제를 위한 사고의 전환도 절실하다. 재벌개혁을 재벌 옥죄기로 오해하거나 협력업체들을 대기업이 발주하는 물량으로 먹고사는 기업이란 인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위기에서 벗어나려 상생을 외칠 게 아니라 협력업체도 한 식구라는 마인드를 가져야 진정으로 존경받는 기업가가 될 수 있다.


과거 한국에서 정치권력과 재벌은 불가근불가원의 관계였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화를 면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돌아보면 정치권력과 먼 기업일수록 뒤탈이 없었다. 재벌을 정권의 하수인처럼 만들려는 권력에 굴복하거나 타협한다면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파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오이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의심받을 행동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좋다. 불편한 정부 정책만 탓하지 말고 진정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몸에 익혀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해 있어야 기회를 포착하고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


재벌 1세대는 정경유착이란 비판을 받긴 하지만 기업을 일군 공로를 인정받는다. 반면 2세, 3세들로 내려갈수록 강렬한 도전정신이 부족하고 성과를 낼 능력이 있는지 의심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황태자’란 세간의 평이 굳어지지 않도록 하는 건 그들의 몫이다.


<오관철 산업부장>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