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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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

가난 길들이기

by eKHonomy 2015. 5. 27.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스틸사진처럼 간직되는 삶의 장면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내가 살던 곳은 어느 대학 근처의 낡은 동네였는데, 길에 나서면 지나다니는 젊은이의 절반은 그 대학의 학생, 나머지 절반은 술집에 나가는 누나들이었다.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 시내 유흥가에서 비교적 가깝고 값싼 방들이 많이 모여 있는 까닭이었으리라. 어느 날 그 누나들 중의 하나가 친구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저 집!” 탄성 섞인 세 음절이 전부였을까, 아니면 내가 미처 못 들었던 것일까?

바로 그 순간, 그리고 중년이 된 지금도 가끔씩 그 장면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아파온다. 그녀가 가리키던 작은 이층집은 그다지 여유롭지 못한 가정형편의 어린 내 눈에도 썩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럼에도 그 누나가 적어도 가까운 장래에 그 집을 살 수 있을 돈을 모으기 어려울 것이라는 어렴풋한 예감 때문이기도 했다.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상대적 소득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내 경험칙으로도 그렇거니와 믿어도 좋을 만한 학문적 근거도 있다. 불평등 연구의 대가인 영국의 경제학자 앤서니 앳킨슨이 최근 저서에서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그렇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소득 상위 1%에 너끈하게 들어가는 변호사와 은행가들에게 소득 상위 10%의 수준을 맞혀보라 했더니 실제보다 4배 이상 되는 금액을 말했다. 반면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경계선일 것이라고 답한 금액은 총소득의 중간값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보통수준의 소득을 ‘빈곤’이라 여긴다는 뜻이다. 자신의 소득수준을 과소평가하는 만큼이나 가난한 사람의 소득수준은 과대평가하는 셈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은 남들에 비해 선하고 열심히 산다는 착각을 하고 있기 마련이니 그럴 법도 하다.

그렇다면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은 어떨까? 혹시 자신의 소득은 과대평가하고 다른 사람들, 특히 잘사는 사람들의 소득은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는 훨씬 낮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래도 나는 진짜 없는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자위하거나, 실제로는 훨씬 더 소득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설마 그 정도로까지 높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이 가설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어설픈 경제학자인 내가, 그것도 아무런 근거 없이 예의 어린 시절 기억 속 사진을 떠올리며 해 보는 얘기에 지나지 않으므로.

상위 10% 하위 10% 가구 월소득 (출처 : 경향DB)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내 가설이 틀려서 가난한 이들도 부자들과 똑같이 자신의 소득은 과소평가하고 다른 이들의 소득은 과대평가하는 것이라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을 듯하다. 정의상 한 사회 안에는 가진 이들보다는 가지지 못한 이들이 더 많을 터인데, 가지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처지를 실제보다 더 나쁘게 보고 가진 이들의 처지는 실제 이상으로 좋게 본다면, 이른바 사회통합에는 치명적인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이건, 설사 그것이 가혹한 폭력에 기초한 노예제사회라 하더라도, 노예가 기꺼이 노예됨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안정적으로 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건 군사독재건 간에 결국에는 대중의 동의에 기초한 것이라는 얄미운 주장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대중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그 동의가 없이는 체제 자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떡고물을 조금이라도 나눠 주었던 것에서 복지국가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철혈재상이라 불리는 비스마르크가 복지국가의 역사, 그 첫 장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 떡고물조차도 주기 어렵다(혹은 아깝다)는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였을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일지도 모른다. “이마에 땀 흘려 양식을 취하리라”는 원칙을 가르침으로써 길들이려는 이들이 한편에 있다. 떡고물 던져주는 시늉은 가끔 추임새로만 넣는다. 어쩌면 훈육하려는 이들은 맞은편에 있는 이들의 처지를 과대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맞은편에 있는 이들이 스스로의 처지를 과대평가할 때 훈육이라는 목표는 쉽게 달성된다. 그리고 체제는 다시금 단단해진다.

어쨌거나 나는 그 옛날의 그 누나가 지금쯤 그 정도는 되는 집에 살고 있기를 꿈꾼다. 그리고 그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단단해져만 가는 이데올로기를 허물어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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