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 카테고리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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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47

4%의 경제학을 넘어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난 10월27일자 칼럼 ‘탄핵 혹은 하야, 그 이후’에 관해 쓸 때만 해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뭉클뭉클 피어나는 의구심을 희망적 사고로 누르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 후로 몇 주가 흐르는 사이에 마침내 광장의 정치가 대의제 민주주의를 압도하면서 이끌고 가는 형국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이란 얼마나 간사하고 나약한가? 마치 영원히 지속될 듯했던 군사독재가 끝나자 불의에 항거하는 치열한 청춘이었던 듯 스스로를 속였던 한 세대 전의 기억이 떠오를 정도이다. 물론 상황이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여론조사 결과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현재의 전선은 4 대 96, 후하게 잡으면 10 대 90의 구도를 갖고 있다. 이러한 전선에서 물색없이 자신의 정치적 편견을 주장하다가는 자칫 벼랑 밑으로 떨어지기 일쑤.. 2016. 12. 12.
[경제와 세상]탄핵과 하야, 그 이후 밤새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영락없이 풀방구리에 드나든다는 쥐 꼴이 되어 이리저리 들락거렸다. 도대체 이 판국에 경제칼럼을 어떻게 쓴다는 말인가? 제법 싸늘해진 새벽 공기를 가르며 버스를 기다리다 급해진 마음에 택시를 잡아탔건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 뉴스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다” “부끄럽다”는 장탄식만 터져 나온다. 얼마 전만 해도 세상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 한가한 뉴스를 일삼던 바로 그 방송국이다. 진행자는 마지막 멘트에서 급기야 10·26과 부녀의 운명마저 언급한다. 공교롭다. 신돈에서 라스푸틴, 차지철에 이르기까지 온갖 요승과 실세의 호가호위가 망국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의 유령들이 불려 나와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닌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2016. 10. 27.
[경제와 세상]누진제 논란, 현실이 빠진 상상의 전선 왠지 이번 올림픽은 적어도 텔레비전 바깥의 세상에서 그리 대단한 열광의 대상은 아닌 듯하다. 분명한 것은 “조국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태극전사”라는 표현이 어색함을 넘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스코리아는 민간외교사절, 노동자는 수출역군이나 산업전사로 호명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올림픽 중계화면을 보라. “우리”를 정의함에 있어 “핏줄”에 민감하기로는 세계 최고일 한국 대표팀에도 외국계 선수가 있고, 일본 럭비팀에는 남태평양 지역 출신의 귀화인이 무려 열 명 가까이 있다. 그러므로 “펠프스라는 나라가 있다면?”이라는 흥밋거리 기사는 본질에서 비켜나도 한참 비켜났다. 이미 펠프스라는 “기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놓고 프로선수들을 모아 시합을 치.. 2016. 8. 18.
기본소득과 개·돼지 사이 벌써 7~8년 전의 일이다. 교육부 학술연구비 지원심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는데 최종심에 올라온 계획서 중에 기본소득 제도에 관한 연구가 있었다. 계획서도 충실하고 연구진 구성도 탄탄한 편이었는데, 전원 경제학자로 이루어진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는 아주 박한 평가를 받았다. 좌장 역할을 했던 터라 각 심사위원의 비공개 평가점수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른바 진보 성향을 지닌 한 분을 빼고는 만장일치에 가깝게 최하에 가까운 점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의 심사위원 한 분이 해당 주제는 결코 좌파적 의제가 아님을 역설했음에도 다른 심사위원들은 아예 그 연구계획서에 관해서는 언급 자체를 안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침묵함으로써 무시하는 전략”이었던 셈이다. 제1야당 대표가 스스로의 평가만큼이.. 2016. 7. 14.
낭비하는 동물로서의 인간 “정치적 동물”이니 “경제적 인간”(호모 이코노미쿠스)이니 “유희적 인간”(호모 루덴스)이니,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또 누군가 현대의 유명한 학자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정의는 끝없이 이어진다. 주어를 하나의 술어로 남김없이 묘사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할 터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미 그 비슷한 규정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인간은 낭비하는 동물이라는 명제를 하나 덧붙여야 할 듯하다. 낭비의 사전적 의미는 “시간이나 재물 따위를 헛되이 헤프게 씀”이다. 인류학 개론서에 등장하는 어느 부족장처럼 사람들을 모아놓고 재물을 불태워버림으로써 자신의 위신을 증명하는 것. 경제학자 베블렌이 말한 “과시적 소비”처럼 타인에게 위세를 떨칠 목적으로 소비하는 행위는 비단 부유층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2016. 6. 9.
쿠오바디스, 경제민주화! 나는 흔히 말하는 86세대, 그러니까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에 들어간 세대에 속한다. 사춘기에 접어들 때까지 유신교육을 받았으며 청년기엔 연이어지는 군부 독재를 겪었다. 그 시절만 해도 대학 진학률은 30%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 혹여 대학생이 되어 의식의 전환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 비중은 얼마 안 된다. 요컨대 지금의 기성세대는 민주주의 공화국의 시민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국 사회가 어쨌거나 이만큼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룩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며, 뉴라이트의 주장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 역사에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러나 삶의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사실 그것은 1인1표의 선거제도만으로는 이룰 수 없으며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2016. 5. 4.
경제도 결국 민주주의 문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홍콩 누아르의 한 장면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질 것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라고 외치는 듯했다. 빈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적진에 뛰어들어 가망 없던 형세를 반전시킬 수를 찾아냈으나 결국 마지막 한 발의 총알이 부족하여 장엄하게 무너지는 모습. 그 처절함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바둑을 배워 알고 있던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세 번째 대국 얘기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 노동의 종말, 사이보그가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 한 판의 바둑이 가져다주는 은유와 기호는 끝없이 이어진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충격이었던 세 번째 시합을 보고 나서 나는 그것이 지식노동(자)의 미래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되씹어보니 그것은 이미 우리의 현재인.. 2016. 3. 23.
‘에비’를 쫓는 법 에서 토머스 프리드먼은 맥도널드의 M자형 아치가 있는 나라들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로 흔쾌한 책은 아니었던 탓에 아마 그 근거도 내 멋대로 해석해서 기억한 모양이다. 요컨대 서로 장사를 하는 사이라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전쟁은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프리드먼의 논거인즉 중산층이 두껍게 형성된 사회에서는 안온한 일상을 선호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는다는 얘기라고 한다. 개성공단에 관해, 부끄럽게도 원래 큰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 경제적 의미가 어느 정도인지 평가할 능력이 없다. 세상만사에 국제정치만큼 우격다짐의 논리가 작동하는 영역도 드물다. 국제정치학적 논거는 사실 힘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나 따위가 왈가왈부해본들.. 2016. 2. 17.
생계형 정치를 넘어서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만족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가르친다. 종종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있어 문제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오랜 관찰 끝에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설명하는 논리로 그럴듯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진 이론일 것이다. 경제학의 대원칙을 받아들이면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일도 별로 없다. 그 따름정리로 정치인의 목표는 득표극대화라는 명제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학교에서 배운 경제이론 중에 인정하기 싫은 순서로 꼽자면 첫째 자리에 놓을 만한 것이었다. 그 이론을 배우던 때는 바야흐로 “민중학살의 원흉”이 철권통치를 하던 시대였으니, 정치는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때로 목숨까지 거는 숭고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YS의 3당 합당은 적어도 내게는 엄청.. 2016. 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