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를 쫓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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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

‘에비’를 쫓는 법

by eKHonomy 2016. 2. 17.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토머스 프리드먼은 맥도널드의 M자형 아치가 있는 나라들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로 흔쾌한 책은 아니었던 탓에 아마 그 근거도 내 멋대로 해석해서 기억한 모양이다. 요컨대 서로 장사를 하는 사이라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전쟁은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프리드먼의 논거인즉 중산층이 두껍게 형성된 사회에서는 안온한 일상을 선호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는다는 얘기라고 한다.

개성공단에 관해, 부끄럽게도 원래 큰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 경제적 의미가 어느 정도인지 평가할 능력이 없다. 세상만사에 국제정치만큼 우격다짐의 논리가 작동하는 영역도 드물다. 국제정치학적 논거는 사실 힘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나 따위가 왈가왈부해본들 소용도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명색이 경제학 비슷한 것에 관해 한 마디는 덧붙여야겠다.

철수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학용품 사라고 받은 돈을 쪼개서 피시방에 가서 놀았다면, 그 돈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인가 어머니에게서 나온 것인가? 어느 여당 정치인이 든 비유라는데(물론 가십기사의 성격상 “와전”일 가능성도 크다!), 이 비유는 경제학자의 냉철한(?) 눈으로 보면 스스로 무덤을 파는 논리, 즉 개성공단에서 얻은 수입이 핵무기나 미사일 만드는 데 들어갔다는 증거는 애초부터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할 때에나 아귀가 맞는 것이다.

나는 개성공단 초기에 그것이 민족경제의 실험장으로서 매우 중요하다는 말을 하필이면 일본인 경제학자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데, 문득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고작 월급 십 몇 만원 주는 노동착취는 아니고?”라는 심통 사나운 생각을 했었다. 경제학적 분석의 과학성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흔한 경제효과의 논리로 개성공단 폐쇄의 사회적 손실을 축소하거나 반대로 부풀리거나 그 어느 쪽도 선뜻 손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굳이 구차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사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걱정스러운 현상, 마치 유신론자와 무신론자가 논쟁하듯이 각자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현상 때문이다. 불변의 팩트라 주장되던 것이 하루 만에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져도, 그 ‘팩트’에 기대던 이들은 어차피 본질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최근 ‘영남 패권주의’를 넘어 ‘영남 파시즘’이라는 말까지 등장한 모양이다. 나도 술자리에서 제법 논리까지 세워가며 ‘금연 파시즘’을 성토한 적은 있거니와 막상 한국사회가 그동안 이루었던 많은 성취들이 순식간에 뒷걸음질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요즘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맴도나 차마 두려워 입에 올리지 못한다. 할머니가 장롱을 두드리며 “에비 온다” 할 때 숨죽이며 이불 속으로 숨던 어린 시절 기억 속의 그 ‘에비’처럼.

‘국민학생’ 때부터 ‘총력안보’에 ‘국론통일’ 구호를 외우며 자란 세대인지라 나는 자나 깨나 ‘북괴의 남침위협’에 떨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또 이러다 말겠지”라는 달관의 경지를 남몰래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매우 두렵다. 바로 그 ‘에비’가 어느새 성큼 방문 너머에 와 있다는 것, 헬조선에 탈조선, N포세대 등 온갖 극사실주의적 조어들이 어지러이 춤을 추면서 그 에비의 물적 기초가 익을 대로 익어 있다는 사실, 은유로서의 에비가 아니라 현실로서의 에비를 마주하는 공포 섞인 기시감 때문이다.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소극으로.”

그 주인공인 나폴레옹 3세가 촉발한 전쟁에서 정작 황제 자신은 항복한 뒤에도 프로이센군에게 봉쇄당한 파리 시민들은 동물원의 코끼리까지 잡아먹으며 버텨야 했다. 황제는 망명지에서 쓸쓸히 죽었다. 그가 벌인 것은 한바탕 소극이었으되,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 그것은 끔찍한 비극이었다.

그러고 보니 맥도널드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1988년 나는 어쨌거나 민주화라 선언된 세상에서 중산층이 된 기분으로 빅맥을 씹어 삼켰다. 빅맥처럼이나 어느새 정크 푸드의 처지가 되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소중한 가치들을 외면할 때, 우리는 결국 에비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에비는 그 옛날 에비처럼 이불 밑에 숨어 눈을 감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허위와 협박, 거짓된 집단정서를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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