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도 결국 민주주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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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

경제도 결국 민주주의 문제다

by eKHonomy 2016. 3. 23.

그것은 다름 아닌 홍콩 누아르의 한 장면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질 것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라고 외치는 듯했다. 빈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적진에 뛰어들어 가망 없던 형세를 반전시킬 수를 찾아냈으나 결국 마지막 한 발의 총알이 부족하여 장엄하게 무너지는 모습. 그 처절함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바둑을 배워 알고 있던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세 번째 대국 얘기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 노동의 종말, 사이보그가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 한 판의 바둑이 가져다주는 은유와 기호는 끝없이 이어진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충격이었던 세 번째 시합을 보고 나서 나는 그것이 지식노동(자)의 미래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되씹어보니 그것은 이미 우리의 현재인 듯하다. 인터넷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아자황 박사. 스스로도 아마 6단의 실력자이고 바둑과 인공지능 연구로 살아왔다는 그는 때로는 나 정도의 하수가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떡수”도 그저 모니터가 시키는 대로 또박또박 갖다 놓았다. 어쩌면 우두머리가 바뀌면 신념도 바뀌고(그에 맞추어 바꾼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마땅한 자리가 주어지면, 아니 마땅한 자리를 얻기 위해 말을 바꾸는 정치인이나 관료, 오너가 시키는 일은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묵묵히 수행하며, 이제는 젊은이들에게 취업을 빌미로 나라 사랑까지 확인하려 드는 우리 모두 이미 그 누군가의 하수인이 아닌가?

경제학의 목표가 사회 전체의 후생을 극대화하는 데에 있는 것이라면, 어떤 전지전능한 주체가 균형가격을 결정해 주고 소비자나 생산자는 그저 그 가격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묵묵히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이미 20세기 전반에 경제계산이니 시장사회주의니 하는 이름이 붙은 논쟁에서 증명된 바이기도 하다.

새누리당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4.13 총선 후보자 등록을 하루 앞둔 23일 밤 유승민 의원의 지역구인 대구 동을 지역 등의 공천 심사를 위한 전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당사로 들어서고 있다.(왼쪽 사진) 앞서 김무성 대표가 유 의원의 지역구에 대한 공천 심사와 관련 “대구 동을은 오늘 오후 공천관리위원회에서 합당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무공천 지역으로 결정하는 것이 옳다”는 내용의 긴급 기자회견을 연 뒤 나서고 있다. _강윤중 기자


사실 이런 생각을 조금만 더 밀고 나가 사심 없는 현자가 사회를 기획하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라는 논리로 이어가기는 쉬운 일이다. “우리”가 힘을 합쳐 물리쳐야 할 거대한 적이 눈앞에 있다는 현실 혹은 그 현실을 빙자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먹힐 때 어느덧 그 적과 싸우는 우리도 적과 똑같이 닮은 괴물이 되고 만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과거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운동권은 “이것만이 옳은 길이니 나를 믿고 따르라”는 논리를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하니 이러한 습속을 가진 이들이 세월이 흐른 뒤에 정반대의 이념을 신봉하면서 왜 나를 따르지 않느냐고 호통을 치는 것도 이상할 바는 없다. 평생 무속을 신봉하던 이가 어느 순간 광신적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처럼, 허울은 바뀌었으되 습속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선거 국면이 다가오면 정치인들의 시간 지평이 짧아지는 것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어느 진영에 속하건, 어떤 의미에서건 간에, 현실의 정치에 답답함을 느끼는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간이 몇 년, 심지어 몇 달이라면 일단 이기고 봐야 한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기도 할 것이다. 어디에는 강아지를 내세워도 당선될 거라는 유권자 수준이 절망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그저 특정인이 당선되는 것, 심지어는 특정인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성취되는 것이 아님은 이미 한국사회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나쁜 적에 나쁜 방식으로 맞서 이기는 것과 좋은 방식으로 맞서다가 지는 것, 어쩔 수 없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결국 후자를 골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경제민주화, 경제민주주의, 그 무엇으로 부르건 간에 그것도 결국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며 일하는 삶, 그 삶의 운영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 자체가 민주주의 원칙을 위배하고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 그것은 더한 괴물이 되어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정치건 경제건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서로 갈등하고 협력해야 하는 것이라면, 결과 못지않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슬기롭게 조정해내는가가 중요하다. 소통이 화두가 되는 시대, 막상 소통은 사라지고 이기기 위한 대동단결이나 구호만 떠돈다. 주가상승과 고도성장의 자리를 경제민주화가 대신하더라도 삶의 습속이 바뀌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은 어지러운 춤판일 뿐이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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