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형 정치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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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

생계형 정치를 넘어서

by eKHonomy 2016. 1. 13.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만족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가르친다. 종종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있어 문제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오랜 관찰 끝에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설명하는 논리로 그럴듯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진 이론일 것이다. 경제학의 대원칙을 받아들이면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일도 별로 없다. 그 따름정리로 정치인의 목표는 득표극대화라는 명제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학교에서 배운 경제이론 중에 인정하기 싫은 순서로 꼽자면 첫째 자리에 놓을 만한 것이었다. 그 이론을 배우던 때는 바야흐로 “민중학살의 원흉”이 철권통치를 하던 시대였으니, 정치는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때로 목숨까지 거는 숭고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YS의 3당 합당은 적어도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즈음에 정치학을 공부하는 지인이 말하기를, 은퇴 선언하고 떠난 DJ는 반드시 돌아와 다시 권력에 도전할 것이며 유일한 방법은 “역3당 합당”, 다름 아닌 “학살의 하수인들”과 손잡는 것이라고 했을 때, 나는 처음에는 실소를 터뜨렸고 나중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도리질쳤다.

막상 그 예측이 엇비슷한 방식으로 실현되었을 때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는데,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의 득표극대화이론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나름의 방식으로 실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나는 입만 열면 오너 체제의 해악을 들먹이면서도 바로 그 잘 나가는 재벌그룹 계열사인 경제연구소에 취직하고 싶었으며, 내 “능력”과 “패기”에 감복한 어느 사학재단 이사장의 “통 큰 결단”으로 어엿한 전임 교수가 되는 막장 드라마급 꿈도 꾸곤 했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더라면 단언하건대 나는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로서의 정치”라는 관점, 누군가가 말했듯이 모든 국회의원의 꿈은 “생명연장”, 간단히 말해 한 번 더 하는 것임을 받아들인다면, 정치인의 그 어떤 선택, 돌변한 입장을 궁색한 논리로 포장하거나 한참 왼쪽에서 한참 오른쪽으로 스스로도 헛갈릴 정도로 옮겨 다니는 것 따위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YS 집무_경향DB


노골적으로 말해 특정 재벌이 어느 무명 중소기업보다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인 의미에서 더 “나쁘다”고 판단해서 재벌기업 입사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중소기업으로 달려갈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 것인가? “차라리 내가 ‘나쁜’ 기업에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덜 나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등의 자기합리화 기제는 조금만 궁리하면 몇십 가지라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터이다.

YS의 1990년은, 그에게는 대통령 당선이라는 개인적 성공으로 이어지는 도박에 가까운 결단의 해였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친북 좌파”의 집권을 막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보수 꼴통”의 장기집권 구도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어쨌거나 역사적 의미도 지닌 것이었다. YS의 “결단”이 그러한 것처럼 2016년의 “결단”도 궁극적으로는 정치인들의 “생계”를 위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지금의 그 많은 결단들은 개인적으로는 실패할 때 오히려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YS의 그것과는 달라 보인다. 이른바 진보의 지리멸렬과 이른바 보수의 필승구도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만들어졌던 사건을 희극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경제학으로 돌아가본다. 곰곰 생각해보면 자신의 이익을 좇아 행동한다는 원칙도 맥락에 따라 대단히 모호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남과 돈거래를 할 때는 약간 손해본 듯한 기분이 들면 잘한 것이라는 어른들 말씀을 기억한다.

친한 친구 애경사 때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여 1만원짜리 한 두 장 아꼈다가 한참 동안 친구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던 기억도 있는 걸 보면, 당장의 이익을 좇아 움직이는 것이 길게 보면 외려 내 이익을 갉아먹는 것인 듯도 하다. 정치인이건 누구건 간에 대의를 위해 십자가를 지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생계”를 꾸리는 방법도 여러 가지이니 굳이 하나를 고집할 까닭은 없고, “하던 도둑질”이니 어쩔 수 없이 계속한다 하더라도 당장에는 이익처럼 보이나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되는 길을 가지 말라고 부탁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 정도의 부탁 따위로 이미 뒤집을 수 있는 흐름이 아니라는 단기적 전망보다도 1990년에 시작된 역사가 비로소 완성될지도 모른다는 장기적 전망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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