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 경제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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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

쿠오바디스, 경제민주화!

by eKHonomy 2016. 5. 4.

나는 흔히 말하는 86세대, 그러니까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에 들어간 세대에 속한다. 사춘기에 접어들 때까지 유신교육을 받았으며 청년기엔 연이어지는 군부 독재를 겪었다. 그 시절만 해도 대학 진학률은 30%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 혹여 대학생이 되어 의식의 전환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 비중은 얼마 안 된다. 요컨대 지금의 기성세대는 민주주의 공화국의 시민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국 사회가 어쨌거나 이만큼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룩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며, 뉴라이트의 주장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 역사에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러나 삶의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사실 그것은 1인1표의 선거제도만으로는 이룰 수 없으며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향해 다가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지침이 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난 대선에서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되었던 것이나 이른바 갑을 관계에 대한 여론이 들끓었던 것은 우리 사회구성원들의 민주적 감수성이 그만큼 예민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가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로 드러났다. 진보냐 보수냐를 막론하고 일정 부분 민의에 의한 심판이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그런데 경제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과연 낙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인지 찜찜한 기분을 떨쳐 내기 힘들다.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할 진보정당의 힘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여당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경제민주화를 굳이 주장할 의지도 없어 보이고 제 몸 하나 추스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제3지대를 열었다는 또 하나의 야당은 기술적으로만 생각하자면, 두 정당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다가 어느 한 쪽으로 결합함으로써 최종 승자가 되는 것이 가장 유망한 길이다. 이미 이십여년 전에 민주화의 영웅이었던 YS가 군부독재의 중심 세력과 합당하는 묘수를 선보인 것에 비하면, 그것을 다시 한 번 시도하더라도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15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경제할배와 허심탄회 런치토크’를 마친 뒤 나오고 있다._경향DB

사정이 이러하니 “경제민주화 할아버지”가 대표로 있는 제1야당에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흔히 한국 사회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유를 들곤 하는데, 내가 아는 한 그 기울어짐의 정도로 말하자면 경제학계에 버금갈 곳이 없다. 단언하건대 한국의 경제학자들 중에서 경제민주화가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지 고민하는, 심지어는 그 말 자체를 진지하게 입에 올리는 이들은 10%도 채 안될 것이다. 실상이 그러하므로 실체가 제아무리 모호해도 경제민주화를 줄곧 거론하는 분에게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한 달 전쯤 이 칼럼에서 훨씬 완곡하게 경제민주주의도 결국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이제는 단도직입해야 할 듯하다.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고 평가하지 스스로의 주장만 믿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는 선문답 같은 파편적인 발언만 떠다니고 그 구체적인 의미를 어떻게 채워 나갈지 고민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보이지 않을 때, 이미 그것은 막연한 정치구호일 따름이다.

경제민주주의라면 흔히 재벌개혁을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기업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조직 안에서 보스가 전제적 관리를 하며 다수 구성원은 그 관리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을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어쨌거나 총선에서 이긴 것이며 앞으로 대선도 이겨야 한다는 정치공학을 앞세우고, 모종의 전문가적 비밀주의, 요컨대 경제는 어려운 것이므로 아무나 떠들어서는 안 되고 내가 다 안다는 식의 자세는 설사 그 어떤 획기적인 비법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미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이다. 민주적 원칙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자기모순이다. “경제민주화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어야 한다는 역설적 상황이야말로 어쩌면 “한국적 민주주의” 시대의 사후 복수일 것이다. 더 이상 고도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 젊은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는 암울한 미래라는 악령을 걷어 주려면, 그야말로 성역 없는 백화제방의 논쟁이 필요하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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