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하는 동물로서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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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

낭비하는 동물로서의 인간

by eKHonomy 2016. 6. 9.

“정치적 동물”이니 “경제적 인간”(호모 이코노미쿠스)이니 “유희적 인간”(호모 루덴스)이니,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또 누군가 현대의 유명한 학자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정의는 끝없이 이어진다. 주어를 하나의 술어로 남김없이 묘사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할 터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미 그 비슷한 규정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인간은 낭비하는 동물이라는 명제를 하나 덧붙여야 할 듯하다.

낭비의 사전적 의미는 “시간이나 재물 따위를 헛되이 헤프게 씀”이다. 인류학 개론서에 등장하는 어느 부족장처럼 사람들을 모아놓고 재물을 불태워버림으로써 자신의 위신을 증명하는 것. 경제학자 베블렌이 말한 “과시적 소비”처럼 타인에게 위세를 떨칠 목적으로 소비하는 행위는 비단 부유층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가지고 있는 특성인 모양이다. 낭비할 수 있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지만, 동시에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위악적으로 말하자면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맡은 일을 다 하는 이가 보답 받는 세상이란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제 얼굴에 침 뱉기가 되겠으나 남 탓보다는 내 탓이오라는 심정으로 대학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예로 들어보려 한다.

권력을 쥔 교육부는 국정화의 돌격대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 본질적인 역할은 돈을 무기로 대학을 통제하는 데에 있다. 프라임이니 뭐니 해서 지난 십여 년 동안 이름조차 제대로 외우기 어려울 정도로 만들어졌다 사라진(혹은 사라질) 수많은 사업들이 그것이다.

인문학과 공학을 융합·통섭하여 미래의 창조적 인력을 양성한다는 식의 판에 박힌 취지와 함께 사업이 실행되면, 대학들은 눈먼 돈을 따내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똑같은 교수들을 요리조리 묶어 학과 이름만 바꾸고 급조한 커리큘럼으로 사업에 지원한다.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오죽하면 국내 최고라는 서울대에서 “창조경영학과”를 만들려던 움직임도 있었다. 마치 애마 부인 시리즈가 히트치자 “김밥 부인 옆구리 터졌네” 하는 식의 싸구려 제목이라도 만들어 하나라도 더 팔아 보려던 80년대 비디오용 영화산업을 연상케 한다. 그러다 보니 수능시험 치르는 날엔 비행기도 안 뜬다며 해외토픽감이 되는 나라에서 당장 몇 달 뒤의 대학입학 정원도 확정이 안 된 채 시험을 치른다.


서울시립대·4년제 대학 연간 등록금 비교_ 경향DB


사업에 당첨된 대학은 언론, SNS, 교문 앞 전광판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몇 십억 유치”에 “세계로 도약하는 대학” 따위의 문구를 내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른바 융합 학과에는 검은 머리 미국인이 외국인 교수자격으로 영어 강의를 하고, 심지어 자국에서는 대학 진학이 여의치 않은 외국 학생들이 정원 외로 입학하여 대학에 망외의 등록금 수입과 “국제화 지수”를 잔뜩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다 교육부의 방침이라도 바뀌는 날엔 군대 갔다 오니 학과가 없어졌더라는 식의 서글픈 무용담만 남는다. 총장이나 보직 교수들은 그렇게 따낸 사업실적을 자신의 업적으로 삼아 그 다음 자리를 넘보고, 방학이면 미국 서부나 지중해, 동유럽 따위의 여행하기 좋은 대학들을 찾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양해각서(MOU)를 교환한다. 그렇게 놀러 가서 찍은 증명사진은 다시 홍보 수단이 된다. 다시 “세계로 도약”할 차례다. 결국 쳇바퀴 도는 다람쥐 꼴이다.

낭비건 헛짓이건 부지런히 하다 보면 스스로도 대단한 일을 열정적으로 몸 바쳐 한다는 기만에 빠지는 법이다. 차라리 그 많은 사업경비와 그 허접한 출장 경비를 선별해서 뿌릴 것이 아니라 교육시설 확충이나 학생 등록금 인하에라도 “보편적 복지”로 쓰면 좋으련만, 그것은 경쟁시대에 걸맞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주장으로 치부된다.

청소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경비절감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 되며, “헬조선”에서 너나 할 것 없이 공무원 시험 준비로 내몰리는 학생들에게는 창조적인 인적 자본만 축적하면 이 세상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도전”과 “용기”를 설교한다.

참으로 흥미로운 현상은 “대학”을 “나라”로 바꿔 놓아도 똑같은 문장들로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낭비하는 동물이라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와는 독립적인 특성이겠으되, 그러나 그 두 가지가 악조합으로 엮인 사회에서 모든 낭비의 대가는 아래쪽에 있는 누군가가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자고 나면 겪는 사건들의 본질일 것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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