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 카테고리의 글 목록 (2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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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47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내게 코끼리는 곧 인권이기도 했어요. 서툴고, 거추장스럽고, 성가셔서 우리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존재, 진보에 방해되는 존재, 전신주들을 쓰러뜨리는 등 그저 쓸모없게만 보이는 존재,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해야 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러시아계 이민자로 레지스탕스 전투기 조종사였으며 주 로스앤젤레스 프랑스 총영사를 지냈고, 평론가들의 혹평을 은밀하게 조롱하기 위해 에밀 아자르란 필명을 써서 발표한 으로 같은 사람이 두 번 탈 수 없다는 공쿠르상을 또다시 수상했던 로맹 가리. 그가 죽기 몇 달 전 라디오 방송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남긴 말이다. 로맹 가리를 읽다가 문득 생각의 끈은 코끼리를 타고 하염없이 부유한다. “코끼리에 관해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코끼.. 2015. 12. 9.
다시 교과서를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제 나름의 개성적 기억으로 존재한다. 사람들이 서로 독립적인 것은 서로 다른 기억과 해석을 존중해서다. 부드러운 얼굴로 각자의 기억을 존중하는 가운데 시선을 함께 미래로 맞춰야 한다. 역사의 해석을 두고 다투는 외교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것은 어떤 상징으로써만 통합이 가능한 부족사회에 고유한 일이다.’ 군더더기 없이 잘 써진 문장이다. 뉴라이트 경제사학자인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글이다. 또 다른 그의 말이 있다. “국정이냐 검인정이냐의 논쟁은 자유사관과 민중사관의 일대 투쟁을 의미할 뿐”이며 “이 나라가 선진화해감에 있어서 패배해서는 안될 절체절명의 이념전쟁이다”. 두 가지 말이 그 문장의 유려함만큼이나 매끈하게 이어지는 방법은 논리적으로 두 가지뿐이다. 역사의 해석을 두고 다투는 .. 2015. 11. 11.
가상현실의 논리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나는 몇몇 사악한 인간들의 권력욕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음모나 폭력에 의해 세상이 돌아간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조리한 세상을 이해할 도리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면서, 글쎄 삶의 지혜를 깨우친 것인지, 아니면 젊은 날의 순수함을 잃고 적당히 혼탁해진 탓인지, 특정 개인의 역할보다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 때로는 조직이라 때로는 제도라 불리는 것에 의해 세상이 굴러간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개인적 일상에 안온함을 가져다주는데, 알고 보면 세상에 이해 못할 사람이 없을 만큼 너그러워지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참 당혹스러운 일이기도 한데,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을 두고 “저 놈을 매우 쳐라” 해서 바로잡을 수 있는 일.. 2015. 8. 19.
표상과 의지로서의 삶 반주로 마신 막걸리 두어 잔만 아니었더라도, 약속과 약속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든 틈만 아니었더라도, 시간 때우기 위해 들른 시내 대형서점 철학 매대에서 감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는 몇 달째 누워 있는 자리만 서점에서 내 책상으로 바뀐 채 읽어줄 이의 손길을 기다리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겨우 몇 쪽 넘겨본 앞부분 어느 한 모퉁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시간 속에서 매 순간은 선행하는 아버지를 없앤 후에야 존재하며, 다시 그 자신도 이내 말살되고 마는 것이다.” 그저 통속한 트로트 가사풍으로 해석하자면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갈 따름이거니, 굳이 악다구니를 쓴들 달라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나마 세월이 가르쳐준 지혜일까? 스무 살 남짓할 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2015. 7. 22.
반복과 비극 1929년 10월의 어느 날 뉴욕 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불과 한두 주 전까지만 해도 더 이상의 경기침체는 없다고 선언한 금융회사들이나 경제학자들을 마음껏 비웃으면서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갔다. 영국 BBC가 제작한 대공황의 전개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에는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들이 나온다. 그 첫 장면은 영국의 어느 공업지대, 공황의 한복판에서 문을 닫은 공장들로 가득 찬 곳이다. 황태자의 방문을 맞이해 한 조각 구원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아마도 뒷날 사랑 때문에 왕관을 버리게 되는 세기의 로맨스 주인공, 에드워드 8세였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인용되는 당시의 기록영화. 대한뉴스 느낌이 나는 그 영상 속 아나운서의 내레이션은 이.. 2015. 6. 24.
가난 길들이기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스틸사진처럼 간직되는 삶의 장면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내가 살던 곳은 어느 대학 근처의 낡은 동네였는데, 길에 나서면 지나다니는 젊은이의 절반은 그 대학의 학생, 나머지 절반은 술집에 나가는 누나들이었다.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 시내 유흥가에서 비교적 가깝고 값싼 방들이 많이 모여 있는 까닭이었으리라. 어느 날 그 누나들 중의 하나가 친구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저 집!” 탄성 섞인 세 음절이 전부였을까, 아니면 내가 미처 못 들었던 것일까? 바로 그 순간, 그리고 중년이 된 지금도 가끔씩 그 장면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아파온다. 그녀가 가리키던 작은 이층집은 그다지 여유롭지 못한 가정형편의 어린 내 눈에도 썩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기 때.. 2015. 5. 27.
인문학의 위기와 경제민주주의 비장한 모습으로 출발선에 모여 있는 젊은이들 앞에 허들을 던져주며 속삭인다. “이걸 넘어오면 좋은 일자리를 주지.” 그러나 겨우 허들을 넘은 이들 앞에는 또 다른 허들이 놓인다. 학점이나 토익점수 같은 전통적인 것들도 있지만 직무적성검사니 뭐니 하는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이 끊임없이 추가된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달려가는 이들 사이에서 뒤처지는 이들은 절망한다. 이제는 아예 처음부터 달리기를 포기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끝없이 늘어나는 허들을 가진 장애물 경주. 청년취업 문제를 생각하면 머릿속에 마치 카툰처럼 떠올리게 되는 서글픈 이미지다. 최근에는 기업체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갖출 것, 구체적으로 이공계 전공자라는 허들이 또 하나 생긴 모양이다. 이제는 오래전에 빈사 상태에 빠진.. 2015. 4. 29.
‘전통’과 지배 체제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던 1980년대 말 소련에서는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의 발전이 갖는 모순과 문제점을 다룬 수많은 연구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야만의 흔적이 남아 있던 한국사회에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지닌 젊은 학생들은 어찌 생각하면 소련판 ‘국민윤리’ 교과서에 가까운 그 자료들을 읽으며 지적 목마름을 채우곤 했다. ‘국민윤리’ 교과서라고 해서 일말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거니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야 난다고 했으니, 새삼스럽게 그 시절 독서경향을 반성하거나 비판하고자 함은 아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시절 이름을 날리던 소련 사회과학자들 중 상당수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뒤에도 꿋꿋하게 변화한 시대에 걸맞은 글을 써내며 학계의 중요한 .. 2015. 4. 1.
다시 소득주도 성장을 생각한다 기업가는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그야말로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이 낮아지면 그만큼 시장의 크기는 줄어들고 결국에는 모든 기업가가 고통을 겪게 된다. 상품을 만들어도 팔 데가 없기 때문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여성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은 이를 “자본주의의 본질적 역설”이라 불렀다. 로빈슨의 선배인 케인스가 강조해 마지않았던 사실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 마르크스조차 이미 그 100여년 전에 자본가는 자신의 노동자는 노동자로 보지만, 다른 모든 자본가들의 노동자는 소비자로 본다는 촌철살인의 지적을 남긴 바 있다. 연말정산 소동을 겪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5000달러.. 2015.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