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 카테고리의 글 목록 (4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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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47

소비와 경기가 우려된다고? 오년 전 딱 이맘때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을 배웅하던 날, 서울시청 앞 광장의 인파 속에서 나는 미리 약속도 하지 않았던 친구나 지인들과 마주쳤다. 그중에는 몇 날 며칠을 우울모드로 지낸 이도 있었지만, 나처럼 딱히 그 정치인의 지지자라고 보기 어려운 이들도 있었다. 권력의 내막이야 알 수 없거니와, 그때 내가 머릿속에 떠올린 단어는 “공감”이었다. 아무런 관계도 아닌 어린아이라도 길거리에서 누군가에게 심하게 맞고 있다면, 뛰어들어 말리고 싶은 것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성이다. 타인의 처지를 내 처지로 바꾸어 느낄 수 있는 능력. “보이지 않는 손”이란 말 때문에 자유시장경제의 옹호자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애덤 스미스가 강조했던 개념이다.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달리 그의 죽음은 온갖 정파적.. 2014. 5. 14.
“사랑하는 대통령님”에게 부치는 고언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을 위해서만 쓰는 글이 있을까? 있다. 그 소극적 형태가 일기라면, 그 적극적 형태는 러브 레터일 것이다. 일기는 그 언젠가, 스스로 죽어 사라진 뒤에라도 그 누군가가 읽어 주길 바라고 쓰는 글이다. 그리하여 쓰는 이는 자신이 겪는 일, 느낀 감정을 어느 정도는 아름답게 꾸며 쓰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편지는 어떠한가? 시라노 드 베르주락(지나치게 큰 코 때문에 사랑 앞에 차마 나서지 못했다는, 한국영화 의 그 시라노!)처럼, 그 고독한 삶의 절망 앞에선 문장들은 오히려 꾸밀 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바바리 맨’이었던 젊은 시절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장 자크 루소의 , 또는 의지와 상관없이 방귀를 뀌고 트림을 하는 동물적 삶에 실망하다가 철학적 사색을 통해 극복하는 의 저자 몽.. 2014. 3. 12.
헛소동 영화관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찜찜한 기분을 못내 떨치기 어려웠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1970~80년대의 데자뷰를 느끼는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굳이 내 돈을 내면서 두 시간 남짓 갇힌 공간에서 ‘확인사살’까지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직전의 식사 모임에는 같은 대학의 입학 동기생 넷이 함께 자리했는데, 나를 제외한 셋이 전과자였다. 한명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다른 한명은 국가보안법, 나머지 한명은 폭력(!), 게다가 그중 한명은 전과 2범이었다. “너도 물고문 당해봤느냐?”라며 낄낄거리는 그들 사이에서, 적당히 공부하며 적당히 노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내 학창시절은 순간 “비정상”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그렇게 을 보러 갔고 예상했던 바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영화는 .. 2014. 1. 15.
‘민영화’보다 더 본질적인 ‘경쟁’ 논리 추위를 달래려 국밥에 곁들였던 막걸리의 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세미나 모임까지는 한참 남은 시각, 지하철 역사에서 곧바로 연결되는 대학 건물에 들어서자 별천지가 펼쳐진다. 우아한 실내장식에 은은한 불빛, 세련된 시설의 헬스장, 이태리식 이름이 붙은 카페, 자유롭게 노트북이나 책을 펼쳐 놓고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들 사이에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커피를 마신다. 불콰해진 중년의 겸연쩍음을 감추기 위해 부스럭거리며 이면지를 꺼내 오랜만에 펜으로 휘갈기듯 글을 쓴다. 문득 옥스퍼드나 하버드쯤 되는 외국대학 근처의 노천카페에 앉아 세상을 뒤흔들 문장을 만들고 있는 석학인 양 우쭐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스피노자의 라는 책을 읽고 있다. 정직하게 말하면, “알기 쉬운 스피노자” 따위의 개설서만 두 권째이고.. 2013. 12. 19.
[경제와 세상]반동의 시대, 근본적 원칙 사랑의 성공이 그 대상에 대한 감정노동의 강도와 지속기간에 비례하는 것이라면? 수많은 사랑의 실패자들에게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더 큰 좌절을 안겨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부족한 것은 다름 아닌 내 사랑의 크기였다는 뜻이므로. 사실 굿판을 벌여 놓고 작두 올라타는 무당에서부터 세계화된 보편종교에 이르기까지, 현세에서 복을 얻지 못하는, 아니 오히려 화를 입고 있는 신자들에게 내려지는 한결같은 진단은 “네 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뿌린 만큼 거둔다는 능력주의 혹은 투하노동가치론은 그 이면에 실패를 스스로의 책임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감춰둔 것일 수도 있다. 생뚱맞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노동생산성, 노동소득분배율 따위의 개념어로 가득 찬 프레젠테이션 파.. 2013. 11. 20.
불멸에 대하여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찾아온다고 했던가? 원고마감이 다가오면 애꿎은 인터넷만 들락거리며 경제와 관련 있는 글감을 찾아 하이에나처럼 헤매곤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큰 이슈도 며칠을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러운 이 세상 속에서 “경제”를 찾아내기 어려운 것은 분명 내 게으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정치적 생존을 향한 어지러운 굿판은 경제문제 “따위”는 입에 올릴 수조차 없게 만들어버린다. 도대체 국가권력이 드러내놓고 선거에 개입하고도 그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며, 최고 권력은 뜬금없는 새마을운동으로 국민정신개조(?) 운운하며 “불멸”을 꿈꾸는 어이없는 상황에서, 미국 셧다운 사태가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이라든가 경기회복을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먹다 남은 쓰레기통을 뒤져 적당.. 2013. 10. 23.
국가의 기억을 넘어 뜻하지 않게 주어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십여 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영화를 한 편 보았다. 사실 가장 큰 목적이 해당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내가 미처 섭렵하지 못했던 공백을 메우려는 것이었으니, 줄거리나 결말,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대사 등 거의 모든 것이 예측한 범위 안에 놓여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영화 무대로 등장하는 소도시의 정경이었다.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대도시의 위압적인 풍모와는 달리 나지막한 담장과 좁은 골목길, 심지어 허름한 막창구이집에 이르기까지. 언제였던가, 그 도시에 살던 친구의 집에 들렀던 기억이 문득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니, 어쩌면 나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두 시간도 채 안되는 짧은 동안, 영화 속 장면들은 어느새 친구 집 방문의 기억과 .. 2013. 9. 26.
내가 꿈을 꾸는 이유 류근 시인의 산문집 를 읽는다. 좋게 말하자면 거침없이 자유분방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가벼운 글, 그러나 단숨에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 중의 하나는 언뜻언뜻 내비치는 촌철살인에서 나온다. “싸나희(!) 마흔 넘어서는 어떠한 자리에 가서도 혼자 술값을 감당해낼 능력 없으면 그 자리는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다. 그러고 보니 우연히 마주앉았으나 그다지 애틋할 것도 반가울 것도 없으되 나보다는 돈을 많이 벌 것임이 틀림없는 이들과의 술자리에서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훔쳐보며 지갑 속의 신용카드를 만지작거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 이것이 어찌 ‘싸나희’만의 얘기이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인정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 인정욕구가 대개는 돈 때문에 충족되거나 좌절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 2013. 8. 22.
삶의 연속성과 언어의 불완전성 철학자 강신주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라는 제목의 칼럼(경향신문 7월22일 자)이 제법 논란을 일으킨 모양이다.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하는 것들이 의외로 좁은 세상이기도 하므로 그러다가 마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되어 있다”라는 주장, 나아가 마르크스 의 로도스섬 비유까지 동원하여 “냉장고를 폐기하라”는 주장은, 무슨 맥락인지 이해는 하겠으되,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는 내가 봐도 조금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다. 사실 누구나 알 듯이 우리의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먹고 사는 일도 그렇거니와 사람끼리 부대끼면서 겪는 일이나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 또한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이른바 삶의 총체성이라는 것이 그런.. 2013.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