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기억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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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류동민 칼럼

국가의 기억을 넘어

by eKHonomy 2013. 9. 26.

뜻하지 않게 주어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십여 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영화를 한 편 보았다. 사실 가장 큰 목적이 해당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내가 미처 섭렵하지 못했던 공백을 메우려는 것이었으니, 줄거리나 결말,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대사 등 거의 모든 것이 예측한 범위 안에 놓여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영화 무대로 등장하는 소도시의 정경이었다.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대도시의 위압적인 풍모와는 달리 나지막한 담장과 좁은 골목길, 심지어 허름한 막창구이집에 이르기까지. 언제였던가, 그 도시에 살던 친구의 집에 들렀던 기억이 문득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니, 어쩌면 나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두 시간도 채 안되는 짧은 동안, 영화 속 장면들은 어느새 친구 집 방문의 기억과 뒤섞이면서 내 머릿속에 들어앉았을 터이므로.


우리는 많은 기억을 만들며 살아간다. 논리적으로는 분명히 행위가 먼저 있었고 그 행위에 대한 기억이 남는 것이되, 그러한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바로 나를 이루는 것. 나 자신은 다름 아닌 내 기억들의 총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내 몸에 새겨진 기억들이 나의 행위를 규정짓는 것, 과거의 기억이 만들어낸 현재의 행위가 미래의 기억으로 이어질 것이므로, 결국 기억을 만드는 것은 기억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하니, 마치 닭과 달걀의 문제처럼 행위가 먼저인가 기억이 먼저인가라는 문제가 존재하는 셈이다.


 

눈이 내린 골목길에 연탄재를 뿌려 놓은 서울 홍제동 개미마을 (출처: 경향DB)



과연 한국사회에서 국가에 대한 기억이란 어떤 것일까? 아직도 많은 진보세력에게 국가란 몇 명만 모이면 최루탄 던지고 잡아가서 물고문, 전기고문하던 사악한 주체의 기억으로 어렴풋이 남아 있을 법도 하다. 보수세력이 갖고 있는 국가에 대한 기억, 아마도 북한의 대립항 또는 반공이라는 형식으로써의 그것은, 비록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실상은 ‘부국의 영웅’이라는 신화적 캐릭터와 동일한 것이다. “우리(또는 내 아버지!)가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라는 언술은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이른바 전이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국가는 한편에서는 잊고 싶은 트라우마이거나 다른 한편에서는 기껏해야 텅 빈 공백을 파고든 신경증일 따름이다.


경제민주화에 관한 수많은 말들이 사라진 것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기초노령연금이라는 선거판의 승부수, 그 복지공약의 후퇴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공약을 ‘현실화’한 것이건 ‘먹튀’이건 간에, 국가에 대한 엇갈리는 기억들 속에서는 별다른 파문을 일으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적어도 ‘그들’이 다스리는 국가란 원래부터 ‘나쁜 놈’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텅 빈 공백을 가진 이들에게는 결국 영웅의 후예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나 ‘퍼주기 복지’라는 주입된 기억으로 헤쳐나가야 할 일시적 혼란일 뿐. 그렇다면 증세냐 아니냐라는 정치경제학적 논쟁보다 더 필요한 것은 국가가 세금을 걷어가서 투명하게 집행한 결과로 복지를 누리는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것일 터이다.


아마도 세월이 좀 더 흐르면, 친구 집에 들렀던 내 기억은 영화에 대한 회상과 헷갈리게 될 것이고, 영화 속 주인공이 거닐던 커다란 언덕은 어쩌면 내가 그때 스쳐 지났던 고분에 대한 기억으로 변신할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여자를 기다리던 나지막한 담장은 내가 친구를 기다리던 엇비슷한 모습의 담장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다시 그 도시로 가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할 때에야 비로소 내 기억은 새로운 행위들의 저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굳어져 화석이 되어 버린 기억을 깨기란 쉽지 않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딜레마에 부딪힌다.


나는 염원한다 복지국가를.. (출처 : 경향DB)


이미 오래전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최종심 급의 고독한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오지 않는 최종심의 순간을 위해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허수경 시인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가장 지독한 기다림은 기다림의 기척을 내지 않는 것, 기다린다는 것을 절대로 알리지 않는 기다림”이라 덧붙인다. 그리하여 나는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시간에 이기는 방법은 그저 시간을 견디는 것일 뿐. 그러나 숨죽인 기다림을 넘어서는 의지적 낙관으로.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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