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학자 폴라 스테판이 쓴 <경제학은 어떻게 과학을 움직이는가>라는 책은 경제적 인센티브가 자연과학분야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풍부한 사례를 들어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보면 자랑스럽게도(?) 한국의 사례가 연이어 등장한다. 하나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줄기세포 조작스캔들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명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실었을 때 정부나 소속대학 등에서 받는 장려금에 관한 것이다.
지은이는 한국에서는 ‘사이언스’나 ‘네이처’ 같은 잡지에 논문을 실으면 많게는 연봉의 20%를 넘는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고 썼다. 그런데 국내 포털사이트만 검색해 봐도 금세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한국 실정에 어두운 지은이가 형편없이 과소평가한 것이다.
사실 로또에 가까운 보너스를 챙길 수 있는 국내의 연구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니, 굳이 부러워할 것도 없고 금액이 너무 많다고 항의할 생각도 없다. 문제는 많은 경우, 학문적 성과의 과장, 불리한 실험결과 은폐, 심지어는 실험결과 조작이나 사기 등이 이러한 인센티브 구조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회과학 또는 정책과학(이 경우에도 과학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인지 회의적이기는 하다!)의 경우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조작과 신념, 과학과 이데올로기,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견해 등속의 구분이 매우 모호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 분야의 연구와 관련된 정치적, 경제적 인센티브 구조를 설계하고 집행하는 것은 정치권력에 의해 이뤄진다.
시쳇말로 며느리도 모른다는 ‘창조경제’라는 개념이 살아 있는 권력에 의해 제창되고 나니, 정치권은 물론 기업이나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학술행사나 발간물에는 창조라는 말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경향DB)
‘창조경제의 활성화 방안’, 심지어는 ‘창조경제의 개념정립’ 따위의 주제로 연구비 공모를 하는 안내 메일들도 줄을 이어 날아든다. 국가 단위의 엄청난 크기의 돈에서부터 지방자치단체 단위의 소소한 돈(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크다!)이 ‘창조경제’라는 유령 같은 기표를 뒤집어쓰고 허공을 떠돌아다닌다. 권력이 교체될 때마다 구호를 내걸고 거기에 맞추어 따라오도록 하는 행태야 굳이 이 정권의 문제만도 아닌 것이기는 하겠으나, 적어도 경제분야에서 이렇게 추상적이고 실체없어 보이는 개념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런데 연구자 개인이나 기업, 대학 등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어리보기한 개념이 날아다닐 때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가서 실속을 차리는 것이 최선의 ‘창조적’ 행동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창조경영학과’를 만들겠다는,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개그콘서트 같은 시도를 하려던 것도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진지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명문대학마저도 사정이 이러하니 영혼을 지키기 어려운 공무원이나 국책연구기관 등의 상황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몇 년만 지나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을 휴지조각이 될 운명에 놓인 보고서를 머리를 쥐어짜며 써내야 할 터. 그러나 과감하게 엉터리 같은 일은 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조언은 ‘자리’나 ‘밥줄’이 걸려 있는 이들에게는 무망한 충고일 것이다.
정보기관이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을 뒤흔드는 선거개입을 해놓고 떳떳하게 ‘명예’ 운운하며 편법까지 동원하며 뜬금없는 NLL 논쟁으로 맞불을 놓으려는 작태를 서슴지 않는 것. 논리적으로 보자면 줄기세포 조작이 발각되고 나서 유태인 과학자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것보다도 한참 수준이 떨어지는 행동이다. 문제는 이런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든다는 것. 어쭙잖은 개념으로 말장난을 하는 이들을 견제하고 감시할 깨어 있는 시민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허공에 뜬 개념으로 실속 챙기는 이들도,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이들도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하므로 권력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할 때, 사회과학도 민주주의도 결국 설 자리를 잃고 마는 법이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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