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세상]기업의 사회적 책임, 위선을 넘어서라
본문 바로가기
온라인 경제칼럼

[경제와 세상]기업의 사회적 책임, 위선을 넘어서라

by eKHonomy 2012. 8. 29.

강수돌 | 고려대 교수·경영학 ksd@korea.ac.kr


 

경영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배운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사회의 요청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책임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여 공급하는 경제적 활동 그 자체다. 


다음으로 법적으로 지켜야 할 내용은 준수하라는 법률적 책임이 있다. 다음은 도의적 책임으로, 내부 고객인 노동자는 물론 외부 고객인 소비자, 그리고 지역사회나 자연 생태계 등과 긍정적 상호작용을 하기를 바란다. 이른바 ‘지속가능한 경영’을 하라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재량적 책임까지 요구한다. 그것은 기업이 ‘선제적으로’ 사회를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하라는 것이다. 가진 자의 의무라고 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차원에서 이윤의 일부를 각종 기부금이나 장학금으로 내놓는다든지 공익 병원이나 학교를 세워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을 준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제 하 억울한 민중의 한을 풀어주던 ‘각시탈’과 다른 점은 각시탈 자체가 민중의 일부였다는 점이다.


물론 기업들이 사회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 법률적 책임을 넘어 도의적, 재량적 책임까지도 온전히 다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기본적인 경제적, 법률적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도 ‘생색내기’ 식으로 도의적, 재량적 책임을 다하는 척 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초일류 기업’이라 하는 S그룹과 그 계열사들은 헌법과 노동법에 규정된 노동조합조차 정당하게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각종 기부금을 내거나 사회적 약자 지원을 해준다는 홍보 책자를 돌리며, H자동차는 노동부와 대법원이 ‘불법 도급’이라 판정한 사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당하게 정규직으로 전환시키지 않으면서도 여러 사회공헌 활동을 수행하고 책자도 만들어 낸다. 


이런 경우, 윤리적, 재량적 책임 수행은 경제적, 법률적 무책임을 정당화하는 꼴에 지나지 않으며, 사태를 정직하게 보는 사람들은 이를 ‘위선’이라 부른다.


한편, 독일 베를린에 있는 ‘제너시스 연구소’ 설립자 페터 슈피겔은 최근의 한 책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2.0’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기업들이 이윤추구 과정에서는 별 짓을 다하다가도 느닷없이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이름 아래 온갖 예쁜 짓만 하는 척하는 자기기만을 그만두고, 아예 처음부터 ‘사회혁신적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경제와 사회의 조화를 일관되게 추구하자는 것이다.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가 여성 대출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경향신문DB)


일례로, 가장 가난한 농촌 여성들에게 무담보 소액대출을 해주어 자립할 수 있게 도와준 ‘그라민 은행’, 전기가 잘 들어가지 않아 비싼 에너지 비용을 내야 했던 오지의 시골 마을에 친환경적이고도 값싼 태양광 셀을 높은 장대 위에 달아 문제를 해결한 ‘그라민 샥티’ 사업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또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그룹과 프랑스의 낙농 기업인 다농이 공동으로 ‘그라민 다농’을 만들어 가장 가난한 사람들조차 필수 영양소를 값싸게 얻을 수 있는 식품을 개발한 사업도 기억할 만하다.


그렇다. 기후위기, 사회위기, 금융위기, 경제위기, 정치위기 등 각종 위기가 우리 삶을 위협하는 오늘날, 경제 문제나 사회 문제, 나아가 생태 문제를 분리해 보아서는 올바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빛의 3원색인 푸른색, 붉은색, 초록색이 하나로 잘 섞여 흰색의 밝은 전망을 만들어내듯 경제, 사회, 생태가 조화와 균형으로 통합되어 참된 희망을 만들자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 혁신의 밑바탕에는 사람이나 자연을 더 이상 돈벌이 수단으로 보지 않고 삶의 주체, 즉 소중한 생명체로 바라보는 근본적 시각 전환이 깔려 있다. 시각이 바뀌고 개념이 바뀌면 길이 보인다.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를 ‘눈엣가시’처럼 보지 않고 ‘공동 경영자’로 보는 새로운 기업 경영, 비정규직을 교묘히 활용해 인건비 따먹기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식 노동자로 대함으로써 마음의 상처 없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조직,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자연 생태계를 보존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적 신망을 얻어 더 오래 가는 경영 방식,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 꽃필 날은 언제쯤일까? 지금 이 시대에도 과연 ‘각시탈’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각시탈’이 될 순 없을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