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지난해 말 기준 134조1885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다. 2013년 이후 3년째 부채가 줄어드는 추세지만 금융 공기업을 제외하면 여전히 부채 1위 공기업이다. 지난해 금융부채를 갚는 데 쓴 금융비용만 8778억원에 이른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음에도 부동산 경기 호황에 힘입어 LH는 지난해 9801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순이익 중 1263억원은 정부에 배당했다.
정부가 공기업을 상대로 마른 수건 쥐어짜듯 배당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올해 23개 공기업으로부터 거둬들인 배당금은 1조2190억원으로 사상 최대였다. 지난해보다 39% 급증했으니 ‘배당 잔치’라고 할 만하다. 한국전력공사가 3622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인천국제공항공사 2706억원, 중소기업은행 1491억원 등 LH를 포함해 4개 공기업으로터 각각 1000억원 넘는 배당금을 챙겼다.
한전은 지난해 서울 삼성동 사옥 매각대금 10조5500억원 대부분을 “부채 감축에 쓰겠다”고 했다. 한전 부채는 107조3149억원으로 LH에 이어 2위 규모이다. 하지만 배당을 확대하라는 정부 요청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익은 빚 갚기보다 주주 배당이 우선이었다. 10조원이 넘는 사옥 매각대금 수입이 있었음에도 지난해 한전이 줄인 부채 규모는 1조5684억원뿐이었다.
세수 부족과 재정건전성 악화에 시달리는 정부가 공기업 배당이라도 확대해 세외수입을 늘리겠다는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가 지나치다. 부채가 산적한 공기업은 물론 실적이 저조해도 정부의 배당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다.
부실채권이 늘어나 건전성이 떨어진 수출입은행에 대해 정부는 지난해 말 1조원 현물출자를 지원했다. 그럼에도 지난해 411억원 순이익을 냈다는 이유로 배당 40억원을 챙겼다. 전 국민을 상대로 수신료 인상을 추진해 논란을 샀던 한국방송공사(KBS)에서도 정부는 지난해 10억원, 올해 14억원 배당을 받아갔다. 인천공항공사는 부채가 1년 새 6000억원 넘게 증가했지만 배당은 700억원 넘게 늘었다. 주택도시보증공사 순이익은 400억원 가까이 줄었으나 배당은 200억원 넘게 증가했다. 재벌 총수 일가가 비상장 계열사를 통해 순이익의 상당 부분을 고배당으로 챙겨가는 전횡과 다르지 않다.
주요국 은행과 국내은행 부실채권 비율비교, 주요국 은행과 국내은행의 자기자본 순이익률 비교_경향DB
과도하게 부채가 많은 공기업이라면 발생한 이익을 배당에 앞서 부채감축에 쓰는 게 마땅하다.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도 이익금 용도의 배당금 순위를 이익준비금과 법정적립금에 이어 세번째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배당금 규모는 해당 공기업의 재무구조 특성과 장기 사업계획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배당률을 정하면 공기업은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기획재정부에서 올해 배당액을 얼마로 하라는 지침이 내려온 것으로 안다. 배당은 이사회가 최종 결정하지만 형식적이다. 공기업에 대한 관리감독 권한을 갖고 있는 정부 지침을 어길 수는 없다”고 토로했다.
서울시 산하 공기업인 SH공사 사례는 다르다. SH공사는 택지개발 및 분양·임대 아파트 건축 등 LH와 비슷한 업무를 한다. 지난해 1173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는데, 자본금을 전액 출자한 서울시에 대한 배당은 전혀 없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익이 나면 배당에 앞서 법정 적립금이나 공공주택 사업비로 적립한다. SH공사는 부채가 많기 때문에 이익의 상당 부분을 감채 적립금으로 썼다”고 설명했다. SH공사의 부채비율은 254.5%로 LH(375.9%)보다 훨씬 낮지만 배당은 없었다. 중앙공기업인 LH의 공공 임대주택 사업이 지방공기업인 SH보다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공기업은 이윤만 추구하는 영리기업이 아니다. 부채는 방만한 경영 탓도 있지만 임대주택 건설, 공공시설 확충 등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늘어난 측면이 있다. 이익만 신경 쓰면 공적 기능은 약화하게 된다. 이익은 주주에 대한 배당보다 부채 감축에 써 공기업 자산 건전성과 자생력을 강화하는 게 마땅하다. 실적이 악화해 건전성이 떨어지면 공기업에 시민 혈세를 투입해야 한다.
공기업에 배당만 요구하는 정부는 비겁하다. 증세 논의를 피하기 위해 만만한 상대인 공기업을 착취하는 꼼수로 보인다. 정부는 올해 30.3%인 공기업 평균 배당성향을 2020년 40%까지 끌어올린다고 한다. 이미 빚더미에 오른 채무자에게 원금은 갚지 못하게 방해하면서 높은 이자만 뜯어가는 악질 고리대금업자와 비슷하다. 세수가 부족하다면 근본적으로 늘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증세를 공론화해 사회적 합의를 구하는 게 정정당당한 방법이다.
안호기 ㅣ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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