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이 중대한 기로에 섰다. 우선 올해는 새로운 3년 기한의 중기 물가안정목표제가 시행되는 첫해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은행은 작년 12월16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향후 3년 동안 준수할 물가안정목표를 소비자물가 기준 연 2%로 설정했다. 그 이전 3년 동안의 목표였던 2.5~3.5%의 목표 구간에 비하면 하향 조정된 것임에 틀림없지만 최근의 저물가 추세를 감안할 때 달성하기가 녹록지 않은 목표다. 한국은행은 지난 3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물가안정목표를 준수하지 못한 데 이어, 올해 들어서도 새로운 물가목표를 단 한 번도 준수하지 못했다.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 1%에 그쳤다.
다음으로 향후 통화정책을 담당할 대다수의 금융통화위원이 이번에 교체되었다. 총 7인의 금융통화위원 중 과반수에 해당하는 4인의 위원이 이번에 교체되었다. 특히 최근 한국은행의 소극적인 통화정책 운영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인사들이 새로 금융통화위원으로 임명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마도 이르면 다음 달부터 새로운 통화정책 기조가 등장할 것인지 벌써부터 귀추가 주목된다.
아마 한국은행도 겉으로는 아무 내색을 안 해도 속으로는 고민이 많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들이 금과옥조처럼 섬겼던 물가상승 억제라는 정책 목표가 한순간에 무의미해지고, 세계 각국이 모두 “물가상승을 위한 총력전”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파티가 과열될 즈음에 등장해서 “불 끄고 집에 가라”고 독촉하던 소방수 역할 대신에 “뻘쭘하게 얼어붙은 공연장에 나가서 북 치고 장구 치며 흥을 돋우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근엄한 표정의 교장 선생님에서 화려한 엔터테이너로 변신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옷이야 갈아입을 수 있지만 마음가짐이 변하고 비법을 터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G20 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와 유일호 경제부총리_AP연합뉴스
통화정책 수단도 십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공격적인 금리 인하 정도는 애교에 속한다. 금리가 바닥에 도달해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으면 비전통적 통화정책이라고 해서 문자 그대로 돈을 찍어서 살포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심지어 마이너스 금리를 채택하기도 한다. ‘예금하면 야단치고, 대출받아가면 상주겠다’는 것이다. 중앙은행 총재가 명목임금의 상승을 경제계에 주문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이런 시류를 반영한 것인지 최근에는 총선에서 기상천외한 공약이 나왔다. 새누리당의 공약에 따르면 한국은행으로 하여금 돈을 찍도록 하여 기업구조조정이나 장기 주택담보대출에 자금을 지원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공약 자체는 해프닝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런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을 동원하기에 앞서 아직도 우리에게는 금리 인하의 가능성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확장적 통화정책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 수단은 당분간은 금리 인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금리 인하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결정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은 새롭게 구성된 금융통화위원회의 결정을 지켜보는 것이 맞다. 이것이 그동안 우리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원칙을 통해 구현하려고 애써 온 정책결정 과정이다.
현재 각국의 중앙은행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치려고 애쓰는 변수는 ‘예상 인플레이션율’이다. 예상 인플레이션율을 끌어 올려야 기업가는 투자하고 채무자가 진 빚은 저절로 탕감되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예상되어야 자국 화폐가 평가절하되고, 수출의 가격 경쟁력이 일시적이나마 확보되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예상되어야 명목임금도 인상할 수 있고 가계는 명목상으로 고정되고 실질적으로 그 부담이 낮아진 가계부채를 딛고 소비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현대 통화정책의 요체는 어떤 ‘몸짓’을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앞으로 물가가 오를 것이라고 믿도록 만들 것인가라는 것이다.
발권력을 동원해 돈을 찍어 내고 마이너스 금리를 매기는 것은 다 이런 ‘몸짓’, 그것도 결사적인 몸짓의 표현일 뿐이다.
이런 몸짓의 최고봉은 ‘중앙은행 독립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확장적인 통화정책에 소극적인 중앙은행 총재를 갈아치우는 것은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용의가 있다는 몸짓인 것이다. 아베노믹스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우리에게 아직 그런 날은 이르다. 그러나 그리 먼 미래의 일도 아니다. 한국은행의 선택이 주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성인 | 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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