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불란(一絲不亂). 한 오라기의 실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질서나 체계가 잘 잡혀 있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요즘 청와대와 여당, 정부 모습을 보면 일사불란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지난 12일 박근혜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세법개정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서민·중산층의 세 부담이 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날 오후 기획재정부와 새누리당은 당정협의를 열어 소득세 개편에 따르는 직장인의 세금 부담 증가 상한선을 기존 3450만원에서 5500만원으로 높이기로 결정했다.
전월세 대책 논의하기 위한 당 정 협의 (경향DB)
19일에는 박 대통령의 전·월세난 관련 발언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올해 후반기 주택정책 주안점을 전·월세난 해결에 두고 국민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할 수 있도록 당정 간에 머리를 맞대고 적극적 조치를 취해달라”고 말했다. 다음날 갑작스럽게 당정협의가 열렸고,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폐지 등의 대책이 ‘뚝딱’하고 나왔다.
정부 부처나 공무원들이 대통령의 지시를 신속·정확하게 이행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여당과 정부 간 협의는 정책의 신뢰도를 크게 높인다.
그러나 이번 세법개정안 수정과 전·월세 대책 마련 과정에서 보여준 당·정·청의 일사불란함은 오히려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온다. 토론 없이 모든 결정은 위에서 시킨 대로 기계적으로 이뤄졌다. TV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어명(御命)’ 집행 과정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백명의 엘리트 공무원이 3개월 넘게 밤샘 작업을 해서 만든 세법개정안을 반나절 만에 원점에서 재검토해 수정하고, 복잡다단한 전·월세 정책을 하루 만에 내놓을 수 있겠는가.
청와대는 서민·중산층의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박 대통령의 제왕적 통치 이미지만 국민 뇌리에 각인한 것 아닌지 모르겠다.
오창민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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