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한시적 감세를 해서라도 투자 마중물을 만들자” 촛불혁명 이전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던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내걸었던 구호가 아니다. 집권 3년차를 맞은 문재인 정부가 지난주 발표한 올해 세법개정안에서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세금을 대폭 깎아주겠다고 나섰다. 투자세액공제의 규모와 대상을 대폭 확대해 법인세를 감면해주고 가업상속공제 요건과 주식 할증평가를 완화해 상속·증여세를 줄여준다는 것이다. 모두 그동안 대기업과 재벌 기업주들이 재계와 언론을 통해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해온 ‘주문서 목록’이다.
불과 2년 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금기시되던 ‘증세’를 직접 거론하고 호기롭게 초고소득 자산가와 대기업에 대하여 소득세와 법인세 최고세율을 전격적으로 인상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정부가 재정의 안정적 조달과 국민편익을 위한 세제개혁 방안을 소상히 밝히는 세법개정안이 증세는커녕 ‘대기업 친화적’ 세제지원으로 급격하게 바뀐 것은 심각한 위기감 때문이다. 수출과 대기업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가 미국·중국 무역분쟁과 일본발 수출규제 앞에 있고, 투자 확대 없이는 경제성장도 어렵다는 인식을 했을 것이다. 투자감면에 좋아하는 고용연계도 포기했으니 그 비장함을 알 수 있다. 세제까지 총동원령이 내려진 것이다.
이번 세법개정안의 대표상품인 ‘투자인센티브 3종 세트’는 설비투자하는 기업에 1년간 5320억원의 세금감면을 해준다. 지난 20여년간 존치된 ‘임시투자세액공제’ 이후 투자감면으로는 가장 큰 규모다. 임시투자세액공제가 감면액 전체의 50%를 10대 재벌이, 80~90%인 약 2조원을 매년 대기업들이 독식했듯이 이번에도 그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에 돌아갈 것이다. 단 1년 한시 시행을 예정하지만 투자감면제도의 속성상 조기폐지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세금 많고 감면제도가 제대로 없어 투자를 안 한다는 대기업은 ‘핀셋증세’도 유보하고 국민의 혈세보조금까지 지원해주니 투자에 적극 나설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실질 경제성장률은 설비투자 증가율과 그 관련성이 매우 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설비투자는 투자세액공제제도의 시행 여부나 지속성과 무관하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었다. 경기전망이 불투명하고 투자해서 자본을 회수할 수 없는데 사후적 세제 혜택을 받기 위해 과감한 투자에 나설 리 없기에 당연하다.
게다가 중소기업과 달리 대기업은 지금 돈이 없어서 투자를 안 하는 게 아니다. 훨씬 더 감세 규모가 컸던 과거 임시투자세액공제나 법인세율 인하 때도 투자와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했지만 공염불이었다. 주된 수혜자인 대기업은 같은 기간 투자가 아니라 계속 사내유보금만 늘렸고, 지금 30대 대기업만 따져도 약 950조원에 달한다. 이런 이유로 박근혜 정부는 넘쳐나는 대기업 유보금을 투자에 쓰게끔 과도한 유보금에 세금을 매기는 ‘기업소득환류세제’까지 도입했지만 실패했다. 이런 현실에서 정부가 또다시 국민의 혈세인 ‘세금 보조금’을 대기업에 몰아주면서 투자를 기대하는 것은 무모한 세금낭비가 아닐 수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재정건전성이다. 정부는 긴축재정에서 벗어나 초과세수를 활용한 확장재정을 선언하고 양극화 해소와 경제활성화를 위한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에 나섰다. 그 결과 정부부문이 경제성장에도 일정 부분 기여하고 경기부양에도 작지 않은 효과를 보고 있다. 하지만 대내외 상황이 빠르게 악화되면서 세입여건이 녹록지 않은 데다 재정분권 등 세입 감소 요인이 겹쳐 이 정부 들어 처음으로 세수 부족이 현실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이런 때 확장재정에 필요한 세입기반 확충과 필요한 증세는커녕 이전 정부처럼 다시 대기업 감세에 나선다면 재정의 적극적 역할은 대폭 축소되고 국가부채와 이자 증가로 인해 재정건전성이 크게 악화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집권 2년, 고질적인 양극화를 해소하고 대기업 중심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핵심 정책들이 줄줄이 수정되거나 약화되고 있다. 척박한 토양에 심은 어린 나무이니 물 주고 정성껏 가꿔야 하지만 열매를 따먹을 수 없다는 조급증과 불안감에 초조하기만 하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사회를 포용국가로 만드는 든든한 밑바탕인 국가재정을 위해 ‘소득재분배 세제’는 결코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어려울수록 세금과 세제가 할 일은 과거 정부처럼 막연한 대기업 세금 퍼주기가 아니라 본연의 임무인 확실한 소득재분배와 재정 확보다. 또다시 나라 곳간을 ‘양치기 소년’ 재벌 대기업에 맡길 순 없다.
<구재이 | 한국납세자권리연구소장·세무사>
'경제와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황 극복하려면 뉴딜 정부가 돼야 (0) | 2019.08.21 |
---|---|
부품 소재 산업과 ‘가족기업’의 재발견 (0) | 2019.08.14 |
한·일관계, 루비콘강 건너나 (0) | 2019.07.24 |
외국인 배타문화, 경제발전 해친다 (0) | 2019.07.17 |
응답하라, 한국 슈퍼리치 (0) | 2019.07.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