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제가 쪼그라들고 취업이 안되자 젊은 세대들은 3포, 5포세대에 이어 부모의 재산을 빗댄 ‘수저 계급론’까지 읊조리며 좌절과 무기력의 늪에 빠져 있다. 아산이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이봐, 해봤어?’일 듯하다.” “요즘 젊은이들은 헬조선과 흙수저 신세를 한탄하곤 한다. 하지만 정주영이야말로 ‘식민지 헬조선에서 태어난 흙수저의 전형’이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주 이 땅의 청년들에게 쏟아진 메시지는 추상과도 같은 위엄이 스며있었다.
맞을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정주영의 스토리는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의지를 불태우게 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가 됐다.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등 간판 기업들이 그의 유산이다. 빚내 시작한 자동차 정비공장이 한달도 되지 않아 화재로 잿더미가 됐어도, 공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뿐 아니라 동생들의 집을 팔아야 했어도 주저앉지 않고 일군 결과다. 서산 간척사업에서는 유조선으로 거센 물살을 막아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정신과 창의(創意)를 청년에게 먼저 요구하는 데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청년들은 등록금과 생활비를 빚으로 마련해 더 이상 빚을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다. 고시원·독서실에서 고단한 잠을 청해야 하는 이들은 저당 잡힐 집도 없다.
1984년 2월 서산 간척사업 현장에서 공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정주영 명예회장_경향DB
정주영의 정신은 경제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기업가들에게 먼저 요구해야 했다. 특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속속 임원자리를 꿰차고 있는 재벌 3세들에게 말이다. 기업과 경영진이 저성장이란 뉴노멀(신상태)을 돌파할 경영비전을 제시하고, 중국 등의 추격을 따돌릴 기술개발에 과감히 투자하고 있는가. 그와는 거리가 먼 얘기가 차고 넘친다. 삼성전자는 11조3000억원어치 자사주를 사들여 이를 소각한다고 한다. 주주친화적 경영이라는 의미 부여에도 반도체와 휴대폰 등 주력사업에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는 덮지 못했다. 현대차는 서울 삼성동 한전부지에 10조원 넘는 자금을 파묻었다. 현대차가 중국 충칭에 짓는 제4공장의 전체 투자액이 2조1000억원이니 글로벌 생산기지 5개를 세울 규모다. 삼성·SK·롯데·현대산업개발·두산·한화 등 재벌들은 독점적 이익을 보장하는 면세점 사업에 줄을 섰다. 세계로 뻗어나가 시장을 개척하기보다 국내에 안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엔 안 그랬는데…”하며 청년을 다그치는 것은 본말이 바뀐 것이다.
‘대륙의 실수’라 불리며 세계 5위권 스마트폰 기업으로 성장한 샤오미는 불과 5년 전에 창업한 작은 기업이었다. 공동창업자 겸 부총재인 류더는 “성공 기회가 예전보다 줄어 중국 젊은이들의 좌절감이 크다”며 “좌절한 젊은이에게 믿음을 주는 친구가 된 것이 샤오미의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불굴의 도전정신이 아니라 공감을 기반으로 신뢰와 기술개발에서 성공을 찾았다는 얘기다.
이미 한국의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에 대한 불만 속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알바 급여로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허기를 때우면서도 어학연수, 자격증 등 스펙을 쌓기 위한 ‘노오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기업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겨우 일자리를 잡았어도 비정규직에게 ‘열정 페이’를 요구한다. 이 모두가 ‘헬조선’의 핵심이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위기란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1997년 외환위기 속에서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로 인기를 끌었던 MBC 다큐멘터리 <성공시대> 역시 정 명예회장 얘기로 시작했다. 과거에도 현재도 똑같은, 세상이 바뀌어 그대로 따라할 수 없는 ‘한국식 성공방정식’을 바꿔야 한다. 지금은 청년들에게 ‘노오력’이 아닌 다른 해답을 제시할 때다.
박재현 | 경제부 차장
'온라인 경제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 재벌가 금수저들의 특별한 승진 파티 (0) | 2015.12.06 |
---|---|
[사설]더 암울해지는 2060년 한국, 지금 해야 할 것이 있다 (0) | 2015.12.04 |
[사설] 50세 이상 경제활동인구 1000만 시대의 그림자 (0) | 2015.12.01 |
[기고] 온실가스 배출 없이도 경제성장 가능하다 (0) | 2015.11.30 |
[사설] 인터넷은행, 밀어붙이기로 할 일 아니다 (0) | 2015.11.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