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집’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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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집’이란 무엇인가

by eKHonomy 2020. 7. 23.

천정부지로 오른 강남 아파트값과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지켜보자니 두서없는 생각이 떠오른다. 대치동의 30평 아파트가 20억원을 호가한다는데 이게 제정신인가? 정부의 다주택 보유세, 양도세 중과는 과연 효과를 발휘할까? 왜 그리고 언제부터 ‘집’이 이렇게 돈 놓고 돈 먹기, 환금성 상품이 되어버린 걸까? 우리 몸을 의탁하고, 가정을 꾸리고, 우리의 삶을 만들어주던 이 공간이 그저 소유와 거래의 의미만 갖게 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최근 출간된 이반 일리치의 책에는 ‘파벨라(favela)’라 부르는 브라질 빈민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부와 자본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판자로 지은 빈민촌을 불도저로 싹 밀고 개발하려 하지만, 그때마다 하루저녁이 지나면 판잣집과 천막이 뚝딱 지어지고 사람들이 주섬주섬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그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집이 삶을 찾아 되돌아온다”고 표현한다. 과연 그러하다. 우리는 들어가 살 집을 짓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집이 아니라 삶을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래도록 사람 개개인보다는 집으로 그 사람을 인식했다. 살구나무집, 파란대문집, 703호 아저씨. 따라서 집에서 우리가 사는 게 아니라, 집이 우리의 삶을 살아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산다’는 말이 ‘어디에서 지낸다’는 말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만 봐도, 집이 삶을 찾아 되돌아온다는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산 집을 헤아려보니 정확히 열여덟 군데다. 아버지 사업의 부침에 따라 가족이 셋집과 자가를 옮겨 다닌 것이 열두 차례, 결혼 후 전세를 살다가 은행에 꼬박 월세를 바치는 현재 집을 갖기까지 여섯 군데에 살았다. 평균하여 3년에 한 번은 옮겨 다닌 셈이니, 이것은 ‘정주’가 아니라 ‘유목’이라 하는 게 맞겠다.


인간의 문화가 정주를 시작하면서 꽃을 피웠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삶의 기억과 경험이 세대를 통해 전수되고 문화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한곳에 오래 거주하는 것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공간이 처음부터 저절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땅에 경계를 그어 안팎을 표시하고 사람이 살면서 공간은 비로소 ‘탄생’했다. 인간이 살면서 공간이 생겨났고 또 그 공간이 인간을 계속 살게 했다. 사람의 자취와 때가 없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며, 살 수 없는 공간이다. 그렇게 문화는 장소와 함께 사람이 숨 쉬는 공기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거주의 의미를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집이 없고 돈이 없어서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들, 충분히 잘살지만 차익을 위해 집을 사고팔거나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집은 삶과 무관한 곳이다. ‘부동산’이란 경제용어는 오늘날 집의 정체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재산이자 상품일 뿐 삶을 지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런 집들은 차고와 비슷하며, 우리는 매일 저녁 차고에 몸을 주차하는 임시체류자일 뿐이다. 이렇게 정주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먼 곳으로 떠나기를 꿈꾸고 끊임없이 유목을 시도하는 것도 당연하다.


비록 말에 불과할지언정 아파트와 주택은 거주하는 곳이지 투자하고 거래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이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가. 정부 자신부터 부동산을 국가 경제의 한 축으로 보고 그로부터 부양될 경제적 효과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집을 사람이 사는 곳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집에서 얻으려는 모든 화폐적 가치를 무산시켜야 한다. 불로소득의 대부분을 환수할 정도로 강력한 대책이 아니면 안 된다. 집은 이미 남아돈다. 그리고 집은 거기 사는 사람의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경제 논리가 아닌 삶의 논리로 집을 바라봐야 한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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