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우 | 사회학자
출퇴근길 인파로 꽉 찬 지하철엔 품위나 우아함 따위는 들어설 틈이 없다. 로또만 당첨된다면, 매일 되풀이되는 이 악몽을 끝내고 싶다. 힘
들게 손잡이를 잡고 있는 여자의 구치 백과 지난밤의 삼겹살 냄새를 여전히 풍기는 남자의 에르메스 넥타이는 왠지 지하철과 어울리지 않는다. 저 물건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 왜 이 지옥 같은 지하철을 탔단 말인가? 그는 서민의 삶을 염탐하려고 잠행 중인 왕족일까?
이 아이러니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아마 그 사람들은 과다 지출을 감수하며 ‘명품’을 샀을 것이다. 혹은 그 가방과 넥타이가 이른바 ‘짝퉁’이라면 아이러니는 더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진품이든 짝퉁이든 루이뷔통 가방을 든 사람을 대학에서도 백화점에서도 심지어 재래시장에서도 마주칠 수 있으니, ‘럭셔리 열풍’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커다란 수수께끼로 남는다.
소비는 매우 실용적 행위이다. 하지만 쇼핑의 희로애락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쇼핑이 단순한 경제적 행위 이상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소비는 매우 능동적인 행동인 듯 보여도 그 물건을 사도록 만든 힘은 우리의 외부에 있다. 남 따라 쇼핑가기, 계획에도 없는 것을 소비하기, 있어 보이려고 물건 사기 등이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을 번역 문투로 표현하면 이렇다. 우리는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도록 만들어진다. 소비주의(consumerism)라는 다소 어색한 단어는 이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소비주의가 빚어내는 풍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아주 끈질긴 사유의 관습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우리는 사치품 소비가 여성의 몫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신용카드 빚더미에 시달리면서도 쇼핑 중독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다룬, 베스트셀러이자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칙릿 소설 <쇼퍼홀릭>의 주인공 레베카는 여성이다. 쇼핑 중독을 고백하는 자전적 에세이 <나는 명품이 좋다>로 꽤 짭짤한 인세를 챙겨, 그 돈으로 다시 긴자의 부티크숍을 순례하는 삶을 되풀이하고 있는 나카무라 우사기도 여성이다. 사람들은 책을 덮으며 확신한다.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치를 일삼는 ‘된장녀’들은 사회적 문제야, 라고.
1913년 출간된,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좀바르트의 아주 오래된 책 <사치와 자본주의>(문예출판사, 1997)는 사치를 여성적 행위라고 폄하하는 우리의 관습적 사유의 뿌리를 들여다보도록 해준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좀바르트는 사치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자본주의를 들여다보고, 사치의 기원을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설명한다.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로 머물러 있는 한, 애첩에게 사치품을 제공하는 이른바 ‘애첩경제’는 발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좀바르트의 해석만으로는 ‘럭셔리 열풍’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럭셔리 열풍’은 여성적 현상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이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있다는 유명한 말처럼, 된장녀는 반지하에 살면서도 골프라는 럭셔리한 취미를 즐기는 남자, 손수 자동차를 몰지만 에쿠스만을 고집하는 남자, 21년산 위스키를 맥주와 섞어 구정물 맛이 나는 폭탄주로 만들어 삼키는 남자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사치에 관한 한 양성평등은 법률적 양성평등보다 더 빨리 이뤄졌다. 된장녀를 희생양으로 내세울 경우, 우리는 오히려 남녀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걸려 있는 ‘럭셔리 열풍’이라는 마법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 누구나 빠져 있는 마법을 파헤치기 위해 베블런의 더 오래된 책 <유한계급론>(우물이 있는 집, 2005)을 펼칠 필요가 있다.
노르웨이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베블런은 미국 자본주의의 승자인 ‘유한계급’에게 비판의 칼날을 겨누는 <유한계급론>을 남겼다. 미국 자본주의의 승자인 ‘유한계급’의 삶은 청교도적 근검절약과는 거리가 멀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벌이는 과도한 사치 행각을 ‘과시적 소비’라 불렀다. 중세 귀족들의 과시적 소비는 궁정 속의 ‘그들만의 리그’였지만, 자본주의와 과시적 소비가 만나면 그 효과는 ‘유한계급’의 범위를 벗어난다. ‘과시적 소비’가 ‘유한계급’의 범위를 넘어서는 현상을 분석하는 <유한계급론>은 1899년의 책이지만, <유한계급론>에서 분석한 효과는 바로 지금의 현상이다.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down)가 만날 때, 끊임없는 유행의 사이클이 만들어지고, 유행이라는 현상이 흘러다니는 모세혈관과도 같은 세밀한 길을 통해 과시적 소비는 저 낮은 곳에 있는 계층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그래서 청담동 며느리는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람도 ‘청담동 며느리 룩’이라는 유행 현상에 휘말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따라잡고 흉내 내도 부자가 아닌 사람은 과시적 소비를 위한 럭셔리 상품의 유행이 폭포수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저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없다.
피라미드의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이 흉내 내는 속도보다, 저 높은 곳에서 만들어지는 유행의 스피드는 늘 더 빠르기 때문이다. 다들 기타제재주를 마시다가 부자들만 맛보던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하자마자, 부자들은 12년산 위스키를 마시고, 12년산 위스키를 흉내 내면 21년산이 등장한다.
2층 양옥집에 살던 부자를 따라서 평생 모은 돈으로 양옥집을 지으면, 부자는 아파트로 이사하고 그들을 따라 아파트로 이사하면 부자는 타운하우스로 거처를 옮긴다.
채워지지 않는 흉내 내기가 반복되면, 저 높은 곳에 있는 부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이제 세상의 부자는 질투가 아니라 부러움을 전리품으로 챙기며 자본주의의 전쟁에서 승리한 현대의 위인으로 등극한다.
그래서 부자들이 사용하는 럭셔리 브랜드 상품은 ‘명품’이라 읽힌다. 명품은 승자에게 자본주의가 선물하는 훈장이다. 나카무라 우사기는 ‘명품’의 본질을 잘 간파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란, 부자라는 영광의 골을 향해 맹렬하게 싸우는 게임이다. 그리고 명품은 그 게임의 경품이다.
”(나카무라 우사기 <나는 명품이 좋다>, 58~59쪽)
명품이라는 훈장은 내가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 따위에 아예 관심도 없다.
하지만 한쪽 발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다른 한쪽 발은 욕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는 중산층들이 가장 가련하다. 중산층들은 럭셔리의 유행을 따라 하기에는 돈이 너무 부족하고, 유행과 거리를 두기에는 자본주의의 훈장이 너무도 탐이 난다.
중산층들이 이런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한 럭셔리가 일상의 키워드가 된 사회에서는 실제로 럭셔리 상품 구매 여부와 상관없이 과시적 소비가 만들어내는 유행이 우리의 사유를 지배한다. 이 시대에 부자들은 정치인들처럼 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영리하게도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이 부러움에 근거해 우리의 뇌를 장악한다. 프랑스 대혁명 때 부르주아와 평민은 봉건귀족의 사치에 대항하기 위해 공동의 전선에 서 있었다.
부르주아와 평민의 공동 연합전선은 이미 오래전에 붕괴되었다. 이제 부자들은 자신의 몸은 숨긴 채 중산층들에게 패션의 전도사인 연예인이라는 ‘셀레브리티’를 전면에 내세워 세상을 장악한다.
‘과시적 소비’가 중산층까지 지배하자 공항 면세점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프리미엄 아웃렛은 사람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승리하지 못했으나, 승리가 부러운 사람은 궁색하게 공항 면세점이나 다소 부끄럽게 짝퉁에서 해결책을 찾는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상층의 과시적 소비를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느라 ‘면세점 100% 활용법’과 프리미엄 아웃렛 정보 수집에 두뇌활동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를 지향하던 유권자는 소비자로 변화한다. 유권자일 때 유효하던 1인 1표제라는 민주주의의 놀라운 평등은, 소비자로 변화하자마자 구석에 처박힌다.
유권자는 정의롭지 못한 방식으로 축적된 부를 단죄하는 수단을 손에 쥐고 있지만, 소비자로 변화한 우리는 자본주의의 승자와 패자로 분리된다.
유권자가 소비자가 되는 사회에서, 소비주의는 개인의 무거운 선택을 가벼운 선택으로, 정치투표장에서의 고민을 백화점에서의 고민으로, 정치적 권리인 자유를 경쟁하는 브랜드 중 무엇을 고를 것인가의 자유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부자들의 불법상속에는 무관심해지고, 쇼핑몰에 습관적으로 북적이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투표율은 낮아지고, 고객 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공적인 일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법이다.
이번 주말에도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을 수집하러 차를 몰고 프리미엄 아웃렛으로 몰려갈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프리미엄 아웃렛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치는 순간 멋쩍은 표정을 짓고, 내 훈장이 짝퉁임을 알아보는 눈썰미 있는 사람의 눈초리를 무서워한다. 짝퉁임이 드러나는 날, 자신의 훈장인 ‘명품’은 자본주의의 승자라는 표시에서 속물이라는 딱지로 전락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출퇴근길 인파로 꽉 찬 지하철엔 품위나 우아함 따위는 들어설 틈이 없다. 로또만 당첨된다면, 매일 되풀이되는 이 악몽을 끝내고 싶다. 힘
들게 손잡이를 잡고 있는 여자의 구치 백과 지난밤의 삼겹살 냄새를 여전히 풍기는 남자의 에르메스 넥타이는 왠지 지하철과 어울리지 않는다. 저 물건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 왜 이 지옥 같은 지하철을 탔단 말인가? 그는 서민의 삶을 염탐하려고 잠행 중인 왕족일까?
이 아이러니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아마 그 사람들은 과다 지출을 감수하며 ‘명품’을 샀을 것이다. 혹은 그 가방과 넥타이가 이른바 ‘짝퉁’이라면 아이러니는 더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진품이든 짝퉁이든 루이뷔통 가방을 든 사람을 대학에서도 백화점에서도 심지어 재래시장에서도 마주칠 수 있으니, ‘럭셔리 열풍’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커다란 수수께끼로 남는다.
소비는 매우 실용적 행위이다. 하지만 쇼핑의 희로애락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쇼핑이 단순한 경제적 행위 이상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소비는 매우 능동적인 행동인 듯 보여도 그 물건을 사도록 만든 힘은 우리의 외부에 있다. 남 따라 쇼핑가기, 계획에도 없는 것을 소비하기, 있어 보이려고 물건 사기 등이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을 번역 문투로 표현하면 이렇다. 우리는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도록 만들어진다. 소비주의(consumerism)라는 다소 어색한 단어는 이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소비주의가 빚어내는 풍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아주 끈질긴 사유의 관습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우리는 사치품 소비가 여성의 몫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신용카드 빚더미에 시달리면서도 쇼핑 중독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다룬, 베스트셀러이자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칙릿 소설 <쇼퍼홀릭>의 주인공 레베카는 여성이다. 쇼핑 중독을 고백하는 자전적 에세이 <나는 명품이 좋다>로 꽤 짭짤한 인세를 챙겨, 그 돈으로 다시 긴자의 부티크숍을 순례하는 삶을 되풀이하고 있는 나카무라 우사기도 여성이다. 사람들은 책을 덮으며 확신한다.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치를 일삼는 ‘된장녀’들은 사회적 문제야, 라고.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좀바르트는 사치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자본주의를 들여다보고, 사치의 기원을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설명한다.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로 머물러 있는 한, 애첩에게 사치품을 제공하는 이른바 ‘애첩경제’는 발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좀바르트의 해석만으로는 ‘럭셔리 열풍’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럭셔리 열풍’은 여성적 현상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이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있다는 유명한 말처럼, 된장녀는 반지하에 살면서도 골프라는 럭셔리한 취미를 즐기는 남자, 손수 자동차를 몰지만 에쿠스만을 고집하는 남자, 21년산 위스키를 맥주와 섞어 구정물 맛이 나는 폭탄주로 만들어 삼키는 남자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사치에 관한 한 양성평등은 법률적 양성평등보다 더 빨리 이뤄졌다. 된장녀를 희생양으로 내세울 경우, 우리는 오히려 남녀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걸려 있는 ‘럭셔리 열풍’이라는 마법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 누구나 빠져 있는 마법을 파헤치기 위해 베블런의 더 오래된 책 <유한계급론>(우물이 있는 집, 2005)을 펼칠 필요가 있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벌이는 과도한 사치 행각을 ‘과시적 소비’라 불렀다. 중세 귀족들의 과시적 소비는 궁정 속의 ‘그들만의 리그’였지만, 자본주의와 과시적 소비가 만나면 그 효과는 ‘유한계급’의 범위를 벗어난다. ‘과시적 소비’가 ‘유한계급’의 범위를 넘어서는 현상을 분석하는 <유한계급론>은 1899년의 책이지만, <유한계급론>에서 분석한 효과는 바로 지금의 현상이다.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down)가 만날 때, 끊임없는 유행의 사이클이 만들어지고, 유행이라는 현상이 흘러다니는 모세혈관과도 같은 세밀한 길을 통해 과시적 소비는 저 낮은 곳에 있는 계층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그래서 청담동 며느리는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람도 ‘청담동 며느리 룩’이라는 유행 현상에 휘말리는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피라미드의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이 흉내 내는 속도보다, 저 높은 곳에서 만들어지는 유행의 스피드는 늘 더 빠르기 때문이다. 다들 기타제재주를 마시다가 부자들만 맛보던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하자마자, 부자들은 12년산 위스키를 마시고, 12년산 위스키를 흉내 내면 21년산이 등장한다.
2층 양옥집에 살던 부자를 따라서 평생 모은 돈으로 양옥집을 지으면, 부자는 아파트로 이사하고 그들을 따라 아파트로 이사하면 부자는 타운하우스로 거처를 옮긴다.
채워지지 않는 흉내 내기가 반복되면, 저 높은 곳에 있는 부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이제 세상의 부자는 질투가 아니라 부러움을 전리품으로 챙기며 자본주의의 전쟁에서 승리한 현대의 위인으로 등극한다.
그래서 부자들이 사용하는 럭셔리 브랜드 상품은 ‘명품’이라 읽힌다. 명품은 승자에게 자본주의가 선물하는 훈장이다. 나카무라 우사기는 ‘명품’의 본질을 잘 간파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란, 부자라는 영광의 골을 향해 맹렬하게 싸우는 게임이다. 그리고 명품은 그 게임의 경품이다.
”(나카무라 우사기 <나는 명품이 좋다>, 58~59쪽)
명품이라는 훈장은 내가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 따위에 아예 관심도 없다.
하지만 한쪽 발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다른 한쪽 발은 욕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는 중산층들이 가장 가련하다. 중산층들은 럭셔리의 유행을 따라 하기에는 돈이 너무 부족하고, 유행과 거리를 두기에는 자본주의의 훈장이 너무도 탐이 난다.
중산층들이 이런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한 럭셔리가 일상의 키워드가 된 사회에서는 실제로 럭셔리 상품 구매 여부와 상관없이 과시적 소비가 만들어내는 유행이 우리의 사유를 지배한다. 이 시대에 부자들은 정치인들처럼 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영리하게도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이 부러움에 근거해 우리의 뇌를 장악한다. 프랑스 대혁명 때 부르주아와 평민은 봉건귀족의 사치에 대항하기 위해 공동의 전선에 서 있었다.
부르주아와 평민의 공동 연합전선은 이미 오래전에 붕괴되었다. 이제 부자들은 자신의 몸은 숨긴 채 중산층들에게 패션의 전도사인 연예인이라는 ‘셀레브리티’를 전면에 내세워 세상을 장악한다.
‘과시적 소비’가 중산층까지 지배하자 공항 면세점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프리미엄 아웃렛은 사람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승리하지 못했으나, 승리가 부러운 사람은 궁색하게 공항 면세점이나 다소 부끄럽게 짝퉁에서 해결책을 찾는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상층의 과시적 소비를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느라 ‘면세점 100% 활용법’과 프리미엄 아웃렛 정보 수집에 두뇌활동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를 지향하던 유권자는 소비자로 변화한다. 유권자일 때 유효하던 1인 1표제라는 민주주의의 놀라운 평등은, 소비자로 변화하자마자 구석에 처박힌다.
유권자는 정의롭지 못한 방식으로 축적된 부를 단죄하는 수단을 손에 쥐고 있지만, 소비자로 변화한 우리는 자본주의의 승자와 패자로 분리된다.
유권자가 소비자가 되는 사회에서, 소비주의는 개인의 무거운 선택을 가벼운 선택으로, 정치투표장에서의 고민을 백화점에서의 고민으로, 정치적 권리인 자유를 경쟁하는 브랜드 중 무엇을 고를 것인가의 자유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부자들의 불법상속에는 무관심해지고, 쇼핑몰에 습관적으로 북적이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투표율은 낮아지고, 고객 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공적인 일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법이다.
이번 주말에도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을 수집하러 차를 몰고 프리미엄 아웃렛으로 몰려갈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프리미엄 아웃렛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치는 순간 멋쩍은 표정을 짓고, 내 훈장이 짝퉁임을 알아보는 눈썰미 있는 사람의 눈초리를 무서워한다. 짝퉁임이 드러나는 날, 자신의 훈장인 ‘명품’은 자본주의의 승자라는 표시에서 속물이라는 딱지로 전락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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