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경제 발전과 냉전 사이, 그 혹독한 대가
본문 바로가기
온라인 경제칼럼

[세상읽기]경제 발전과 냉전 사이, 그 혹독한 대가

by eKHonomy 2019. 12. 20.

벌써 20년도 더 된 옛날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있던 저희 가정을 방문했던 장인어른은 한국 차를 보면 그렇게 반가워하셨습니다. “저기 한국 차가 있네. 저기 또 있네”하며 그렇게 좋아하셨죠. 저도 처음에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가난했던 한국을 기억하는 분이 느끼는 감흥과는 같을 수 없었겠죠. 고인이 되신 당신께서 지금 볼 수 있다면 더 놀라실 겁니다. 이제는 한국산 대형차도 쉽게 눈에 띕니다. 한국산 가전제품도 흔하고 대형마트에 사발면도 있으니까요. 그뿐인가요. 제가 일하는 이 시골구석에서도 한류 열풍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발전입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 고속 성장은 미국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해방 후 1970년대까지 총 130억달러의 미국 원조가 들어왔습니다. 같은 기간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받은 미국 원조와 맞먹는 양이었습니다. 1960년대까지 이 원조 덕에 한국 경제가 생존할 수 있었죠. 재벌에 의한 수출 위주 경제발전도 미국이라는 초거대 시장 진입 덕이었습니다. 1964년 16.7%였던 무역의존도는 1974년 60.2%로 급증, 2015년 69.9%로 한국 경제를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미국이 있었죠. 미국은 수십년간 한국 수출의 4분의 1을 빨아들인 부동의 1위였습니다.


남북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국은 소련과 중국을 마주 보는 미국의 전초기지가 됐습니다. 덕택에 한국은 미국의 전격적 지원을 누린 겁니다. 하지만 그 값은 절대 작지 않았습니다. 독재의 억압, 반공의 광란, 사회적 공포 등 혹독한 값을 치렀죠. 불행히도 우리는 아직 그 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지난 16일 국회의사당에서 난동이 일어났습니다. 폭행과 협박이 난무했죠. 언뜻 보면 태극기부대 과격 시위로 보였습니다. 엄마부대 주옥순 등 연사의 거친 발언, 노인들의 주먹질, 그 손에 들린 성조기와 이스라엘기 등이 등장했으니까요. 하지만 태극기시위가 아니었습니다. 주최는 자유한국당이었죠. 황교안 대표, 심재철 원내대표 등 핵심지도부도 직접 참석했습니다. 황 대표는 태극기부대 집회에서나 어울릴 연설을 이어갔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좌파 독재를 목숨 걸고 타도하겠다고 말이죠. 다음날에도 그는 국회 앞에 모여있던 태극기부대를 맞이했습니다. 애초에 국회보다 거리를 선호했던 황교안은 이제 태극기부대를 따라가는 모양새입니다. 급기야 한국당 중진 의원 입에서조차 “태극기집회 수준의 행사는 당이 망하는 징조 … 황 대표가 태극기와 일체화됐다”는 개탄이 나왔죠.


21세기에 아직도 저런 사람들이 있나 고개를 젓는 사람도 많습니다. 세대교체가 되면 저런 주장은 사라지리라 믿기도 하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돌이켜보면 이들의 핵심 주장인 반공사상은 한국 정치 근간이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와 후배들의 독재정권뿐 아니라 이들을 지지했던 언론, 학계, 재벌 등 반공의 노래를 끝없이 불러댔죠. 그걸로 먹고산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당장 태극기집회를 나가봐도 전후 세대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젊은이도 많죠. 전쟁을 겪지 않았건만 빨갱이에 대한 공포는 상당합니다. 이를 허상이라거나 착각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되레 한국 정권을 세우고 사회를 유지해온 본질의 한 현상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니 그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태극기부대, 황교안이 사라져도 제2, 제3의 반공 십자군은 계속해서 나올 겁니다.


한국의 경제 발전과 한반도 냉전은 그 본질입니다. 나눌 수 없는 한 몸입니다. 좋은 것만 취하고 싫은 것은 버리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만, 현실은 그 바람을 늘 배신합니다. 남북대결, 대미종속, 기형적 자본주의로 이루어진 한국 사회의 본질을 바꾸려면 이 중 하나만 건드려서는 안될 겁니다. 한반도 냉전체제를 허물고 싶다면 거기에 맞는 값을 치러야 합니다. 이 중 하나만 바꾸고 나머지는 계속 누리고자 하는 것은 눈앞의 사탕을 다 쥐려는 아이의 욕심일 뿐이죠. 아니면 현상 유지를 바라는 마음을 숨기고자 하는 위선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현상 유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가 오고 있다는 점이죠. 그때가 왔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