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일칼럼]그리스의 가혹한 조치가 비극을 덜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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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제칼럼

[정승일칼럼]그리스의 가혹한 조치가 비극을 덜어낼까?

by eKHonomy 2012. 5. 22.

정승일|복지국가소사이어티 운영위원

2008년 가을 미국에서 시작되어 2010년 초반 유럽까지 덮친 글로벌 금융위기가 계속 심화되고 있다. 이번 금융위기를 대불황(Great Recession)이라고도 표현한다. 1930년대의 대공황(Great Depression) 이래 최악이라는 의미다.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된 이번 금융위기의 주범은 골드만삭스 같은 글로벌 금융회사들이었다. 그리고 각국 정부가 그들을 구제한 것은 파국적 위기에 직면한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공적자금이 워낙 크다 보니 각국의 재정적자 역시 큰 폭으로 늘어났고, 그러자 재정적자가 큰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듯 세계 각국에서 재정적자 폭이 커지게 되니 이번에는 각국의 보수 세력과 투자자들이 ‘재정적자를 줄여라, 특히 복지 재정을 줄여라’ ‘정부는 금융규제를 강화하지 말라’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대드는 격이다. 전 세계적으로 긴축재정 여론이 확산되기 시작한 건 2010년 그리스에서 재정위기가 표면화되면서부터였다.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국들이 복지로 흥청망청하다가 국가재정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럽에서 그리스나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같은 남유럽국들은 오히려 복지 시스템이 가장 허약한 곳이다. 그런데도 2010년까지는 자신들이 지은 죄과 때문에 바짝 숨죽이고 있던 국제 금융자본이 그리스 위기를 기회로 ‘정부가 복지를 너무 확대해서 위기가 터졌다’는 억지를 부리면서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의 재정적자 감축을 위한 긴축에 반대하는 택시 운전사들 항의시위 l 출처:AP연합뉴스/경향DB

그런데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 불황을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다. 불황 속에서 비효율적인 투자와 기업들이 파산해 청소되는 만큼 ‘보이지 않는 손’의 매우 건전한 자동조절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경기 불황에 쓸데없이 정부가 개입해 재정 투입 늘리고 초저금리로 통화량 늘리고 할 필요가 없다.

실제 2008년 가을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을 때 미국 정부가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것에 대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루카스까지 포함해 170여명의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은 구제금융에 반대했다. 지나친 탐욕을 추구하다가 파산 위기에 직면한 골드만삭스 같은 투자은행과 헤지펀드들을 왜 국민의 혈세로 살려주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제1 원리인 자기 책임의 원칙하에 투자한 것이고 그러다가 투자금을 날린 건데 그걸 정부가 구제해주면 시장원칙의 붕괴, 즉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조장된다는 것이다.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은 어차피 파산할 은행·펀드·기업들은 그냥 파산하게 놔두어 퇴출시키는 것이 시장 원리에 부합한다고, 그래야 비효율적인 거품이 청산되어 오직 효율적인 기업과 투자자들만 생존하게 되어 자본주의의 건전성이 회복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논리에 따르자면 유럽의 그리스 역시 가혹한 긴축 조치를 통해 비효율적인 복지 거품을 제거하는 것만이 올바른 경제 회복의 길이다.

문제는 이런 주장이 탁상공론이라는 것이다. 만약 2008년 말 미국 정부가 구제금융을 투입하지 않았다면 골드만삭스, AIG 같은 초대형 금융사들까지 파산하면서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 전체가 핵폭탄을 맞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만약 유럽연합이 그리스에 과감한 구제금융을 투입하지 않는다면 유럽 경제와 세계 경제는 쑥대밭이 될 것이다.

그런데 루카스 같은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은 1997년 말 동아시아 금융위기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봐라, 한국의 재벌과 은행들이 마구잡이로 대출하고 투자해 비효율적인 거품을 일으키더니 마침내 금융위기로 무너졌다”면서 비판했다. 그런데 당시 국내의 진보개혁 경제민주화론자들 역시 시카고학파와 생각이 같았다. 그들 역시 루카스와 마찬가지로 파산 위기에 직면한 재벌 계열사와 은행들을 신속히 파산·퇴출시켜야 하며 ‘보다 철저한 시장개혁’, 즉 재벌개혁과 관치금융 타파를 통한 ‘시장원칙의 관철’이야말로 한국 경제가 살 길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이 흥청망청대다 외환위기 사태를 당했다거나 그리스인들이 게을러서 경제위기를 자초했다는 주류 경제학자와 경제민주화론자들의 주장은 금융위기에 대한 ‘죄와 벌’식 설명이다. 즉 청교도적으로 검약·검소하게 살지 않은 도덕적 죄과(모럴 해저드)에 대한 도덕적 처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벌을 내리는 주체가 누구냐 하면, 바로 신처럼 떠받들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손’, 즉 자유 시장이다. 시장원칙, 즉 자유 시장 원리를 지키지 않아 발생한 위기이니, 당연히 자유 시장 원칙을 회복하면 국민경제와 기업이 건전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그리고 이명박 정부를 지배했다. 그리고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권력이 시장에 넘어가는’ 사태가 발생해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았다.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 다시 또 이런 오류를 반복하겠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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