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향한 한 걸음의 완성, 그리고 또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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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인 칼럼

정의를 향한 한 걸음의 완성, 그리고 또 한 걸음

by eKHonomy 2019. 8. 30.

지금부터 2년 전인 2017년 8월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공여, 횡령, 재산국외도피, 위증 등 범죄 혐의에 대한 1심 선고가 있었다. 1심 재판부는 뇌물, 횡령, 재산국외도피, 위증 등 주요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당시 “형량이 너무 낮은 것 아닌가”라는 불만이 일부 법조인 사이에서 나왔지만, 재벌 총수가 개입된 사건이면 언제나 앵무새처럼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되뇌던 우리나라 법원 풍경에 익숙한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감격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우리나라 최대 재벌그룹의 총수에게 실형이 선고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9일, 대법원은 뇌물 액수도 깎고, 승계작업의 존재나 관련성 등을 부인하면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던 2심 재판부의 판결을 사실상 모두 뒤집었다. 뇌물액이 50억원가량 증가하고 이에 따라 횡령액도 함께 상승했다. 승계작업의 실체도 인정했다. 다만 도저히 집행유예가 나올 수 없는 재산국외도피 부분은 무죄로 확정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이재용 부회장 측 변호인들은 이것을 최대의 성과로 꼽았다고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렇다면 대법원 판결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대법원 선고 직후 언론에 배포된 박영수 특검의 시각이 전체적으로 적절하다고 본다. 박 특검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대법원에서 이재용 피고인의 경영권 승계작업에 대한 부정한 청탁을 인정하고, 마필 자체를 뇌물로 명확히 인정”한 점을 의미 있게 지적하면서, “대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하였다. 나도 이 평가에 동의한다. 2년 전 1심 재판부가 5년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정의를 향한 한 걸음”을 시작했다면, 29일 대법원은 중간에 길을 잃고 방황하던 그 걸음을 바로잡음으로써 “흔들림 없는 한 걸음”을 만들어냈다. 언제나 우리나라 법원에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저주를 끊어낼 첫 단추를 어제 비로소 끼운 것이다.


그러나 1심 재판부의 “한 걸음”을 2심 재판부가 뒤엎었듯이, 이번 대법원의 “한 걸음” 역시 실질적으로 뒤집어질 가능성은 우리 사회 도처에 널려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어떻게 하면 이 소중한 “한 걸음”이 미로 속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보호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미로를 헤맬 첫 번째 가능성은 파기환송심을 담당할 고등법원이 또다시 삼성의 이익을 위해 구태를 반복하는 경우다. 횡령한 금액이 사실상 변제가 되었다느니, 경제가 어렵다느니 하는 주장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최대한 작량 감경을 하여 집행유예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대법원에 ‘재판 잘못했다고 혼난 상황’에서 파기환송심이 또다시 무리한 모험을 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29일 대법원 선고의 역사적 의미를 흐리는 사건은 법원 외부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백일몽을 생각해 보자. 삼성이 이번 정권과 거래를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내용이야 뻔하다. 법원은 폼나게 실형을 선고하고 피고인은 상고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된다. 그 후 경제난국 극복에 동참할 기회를 주자는 명분으로 대통령은 피고인을 특별사면하고, 대통령과 피고인은 함께 다음 대선을 맞이한다. 


물론 이것은 ‘터무니없는 나의 백일몽’에 불과하다. 그러나 매력적인 백일몽임은 틀림없다. 


우선 법원은 무리하게 작량 감경이라는 욕먹을 짓을 하지 않고 맘 편히 실형을 선고할 수 있다. 사법부의 권위가 구겨지지 않는 것이다. 유죄가 확정된 피고인은 특별사면으로 모든 짐을 확실하게 벗게 된다. 그리고 차기 집권세력은 경제를 살리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하는 포용력을 보여주는 정치적 전리품을 챙길 수 있다. 그 외 우리나라 최대의 재벌그룹과 손잡고 대선을 함께 치르는 실리도 기대할 수 있다. 누구도 손해보는 사람 없는 그야말로 윈·윈 전략이다.


정말 그런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촛불혁명이 그토록 끊어내고 싶어한 정경유착의 망령을 되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29일 대법원 판결의 핵심 의미는 승계작업이라는 사익을 가진 재벌 총수가 국정 장악력을 가진 최고 통치자에게 교묘한 방법으로 뇌물을 주었다는 것이고, 이것이 ‘공직은 매수되어서는 안된다’는 국가의 정상적인 운영원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안에 대해 만일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한다면 그것은 아주 가냘프고 힘들게 이어져 온 정경유착의 고리 근절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 될 것이다. 특히 촛불혁명에 힘입어 집권한 이번 정부는 더더욱 그 의미를 되새겨 사면권을 남발해서는 안된다.


“정의를 향한 한 걸음”이 대법원의 29일 선고와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 자제로 완성될 경우 “두 번째 걸음”은 무엇이 될 것인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삼성바이오로직스(이하 ‘삼바’) 회계사기 사건에 대한 정의로운 법집행이다. 특히 최근 들어 밝혀진 여러 증거들에 따르면 삼바 회계사기 사건은 적어도 2014년 10월경부터 사실상 본격화되었고,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작업과 긴밀하게 연관된 사건이다. 80억원이 넘는 돈을 뇌물로 공여하고 그보다 더 큰돈을 재단에 출연했어야 할 긴박한 이유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특히 삼바 회계사기 사건은 승계의 핵심 단계인 제일모직과 (구)삼성물산이 합병하기 이전부터 합병한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그 내용과 형태를 변화시키며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승계 문제 그 자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법원이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는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29일 삼바 주식은 대법원 선고 후 한때 8.5% 가까이 폭락했다가 최종적으로 약 5% 하락한 수준으로 장을 마쳤다. 시장은 이미 새로운 시대를 예견하고 있는 것일까? 일단 파기환송심과 삼바 기소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자.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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