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의 경제시평]동아시아 방역이 ‘선방’한 이유
본문 바로가기
정태인의 경제시평

[정태인의 경제시평]동아시아 방역이 ‘선방’한 이유

by eKHonomy 2020. 11. 24.

올 한 해 전 세계를 뒤흔든 바이러스의 ‘활동기록’, 각국의 신규 확진자나 사망자의 변화 추이를 살펴본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간단한 경제지표인 성장률을 들여다본다.

 

바이러스 관련 지표는 세 가지 유형이 명확히 구분된다. 미국형은 신규 확진자나 사망률 모두 일정한 비율로 증가해서(1, 2, 3차 파동이라고 부르는 미미한 파동은 보이지만) 인구비례 총 사망자가 한국의 100배에 이른다. 다음은 유럽형이다. 바이러스는 뚜렷하게 1, 2차 파동을 보이며 인구를 감안한 사망자는 한국의 약 10배다. 중국, 한국, 대만 등 동아시아 유형은 신규 확진자나 사망자 양쪽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현재 2차 파동을 맞고 있지만 아직은 의료자원이 붕괴하지 않았다. 미국형의 그래프 모습이 독보적인 것은 실제의 봉쇄(lock-down)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제는 유럽이 최악이어서 각국 성장률은 -10%를 기준으로 한 분포를 보인다. 미국은 -5% 언저리, 동아시아 국가들은 0% 정도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간 정도의 방역을 꾸준히 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탁월한 성장을 보이고, 자유방임에 가까운 미국이 중간 정도의 성적을 거뒀다. 방임과 강력한 봉쇄를 반복한 유럽의 경제는 처참할 지경이다.

 

이러한 결과는 각국 경제제도, 사회제도, 정치제도를 근거로 한 각종 ‘자본주의 다양성’ 이론을 뒤흔든다. 가장 강력한 대통령제와 다수대표제를 지닌 동아시아는 비례대표제의 유럽보다 나은 성과를 보였다. 경제와 방역을 동시에 고려할 때, 일반 신뢰나 정부에 대한 신뢰라는 면에서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미국과 스웨덴이 같은 집단에 속한다. 가장 나은 것으로 평가되던 국가보건체제(NHS)를 지닌 유럽 나라들도 바이러스에 잘 대응하지 못했지만(의료재정의 축소가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민간의료보험 체제를 지닌 미국보다는 인구 비례 사망자 기준으로 독일이나 덴마크 등은 10배쯤 나았다(단, 영국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비슷하다).

 

경제와 방역을 동시에 고려할 때, 미국과 유럽 중 어느 쪽이 나은가는 사망자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그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든 방역과 경제를 합친 점수에서 다른 지역을 압도했다. 흔히 아시아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 이미지, 즉 전체주의나 민주주의의 결여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분명히 프리덤 하우스 등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중국과 싱가포르는 권위주의 국가에 속하지만 한국과 대만은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된 지 오래다. 즉 정부의 권위가 만들어냈든, 상당히 자발적으로 만들었든 이들 나라의 시민들은 마스크 쓰기 등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한 규범을 지켜냈다. 말하자면 모두의 생명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들은 오스트롬의 규칙을 제대로 지켜낸 것이다.

 

이런 성과는 이제 빛이 한참 바랬지만 아직도 중국의 경제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불려 나오는 ‘동아시아 기적’을 연상케 한다. 국내의 자원을 총동원해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모델이, 경제가 아닌 방역에서 다시 한번 힘을 발휘한 것은 아닌가? 반면 코포라티즘이든, 시장규율이든 제도가 촘촘해지고 공동체적 규범을 개인주의가 대체해버린 서방은 어떤 자본주의 유형에 속하든 지리멸렬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서 대대적인 인기를 끈 마이클 샌델 교수가 최근 발간한 <공정하다는 착각(원제: The Tyranny of Merit)>에서 “성공을 향한 끝없는 개인 간 경쟁”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 즉 공동선을 달성하기 위한 공동체적 규범의 붕괴가 미국(과 유럽) 사회의 분열과 포퓰리즘을 초래했다고 비판한 것과도 분명히 연관될 것이다.

 

지난 칼럼(‘전쟁기의 정책’)에서 언급한 기후위기와 불평등위기는 바이러스 위기처럼 모두의 생명과 사회 자체를 위협한다. 두 위기로부터의 탈출이 공동의 목표가 되고 합의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이 제시된다면 어쩌면 동아시아 모델은 또 한번 기적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정치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특히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전쟁에서는 끝없이 전략의 수정이 요구되는데 민주적 동아시아 모델은 유일한 희망일 수 있다. 물론 샌델이 지적했듯이 시장경쟁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여기서 발생한 승패는 개인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호도하는 집단은 실패할 것이다. 공동체 민주주의의 정신을 지닌 정당과 지도자야말로 동아시아적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고, 두 위기 해결에서 모범을 보인다면 ‘제3지대’를 선도하는 국가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