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권 행사 모범규준 만들자
본문 바로가기
김상조의 경제시평

주주권 행사 모범규준 만들자

by eKHonomy 2015. 3. 24.

3월은 경제개혁연대가 가장 바쁜 때다. 대다수 기업들의 정기 주주총회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한두 중점감시 대상기업의 주총에는 직접 참석하기도 하지만, 200개가 넘는 기업들의 주총 안건을 일일이 검토하고,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반대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한다. 올해는 약 40개 기업에 대해 보고서를 냈다.

내가 기자들의 전화에 호통을 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3월 주총 시즌에는 특히 그렇다. 막 출입처가 바뀐 신참 기자들의 판에 박힌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외이사가 고무도장으로 전락한 이유는?” 또는 “관피아·정피아·철새교수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걸 막으려면?” 등과 같은 질문이다.

주총에 한번만 가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단상에는 높으신 분들이 앉아 있고, 주주들은 그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주인(주주)과 대리인(이사·경영진)의 위치가 바뀌었다. 더구나 주주 자리는 대부분 직원들로 채워진다. 그러곤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각본대로 직원주주 한 명이 일어나 안건에 동의 발언을 하면, 나머지 직원주주들이 일제히 제청을 외치고, 의장은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린다. 이러니 주총이 30분을 넘기는 경우가 별로 없다. 경제개혁연대가 참석한 주총에서 질의가 조금만 길어져도 직원주주들의 야유가 쏟아진다. “10주밖에 없는 주주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는 거다. 경제개혁연대 멤버들도 이런 주총 분위기를 처음 접하면 정말로 충격을 받는다. 교과서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이보다도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

그럼 고무도장 역할을 하는 사외이사들이나 로봇연기를 하는 직원주주들이 나쁜 사람들인가. 그렇지는 않다. 개개인을 보면 다들 존경받는 사회지도층 인사요, 우리 주변의 성실한 직장인들이다. 다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당근과 채찍을 주는 자에게 충성하기 마련이다. 인지상정이다. 따라서 같은 사람이라도 지배주주에 의해 선임되었느냐 아니면 소액주주의 추천을 받았느냐에 따라 사외이사로서의 행동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정몽준 전 의원의 측근들이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의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며, 결국 두 후보는 사퇴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여러 주주들과 협의하여 27일 개최되는 KB금융 주총에 두 명의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했다.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편, 얼마 전 삼성물산 주총에서 경비업체 직원이 층간소음 문제로 민원을 제기하던 주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사실이 보도되어 논란이 일었다. 삼성이 옛 버릇 못 고쳤다는 비난을 들을 만하다. 그런데 이재용 부회장이 그 주주를 사찰하라고 지시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이 부회장은 주총이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는 윗분께 사소한 불편함도 끼치지 않으려는 실무자들의 과잉충성의 결과물이다. 물론 궁극적 책임은 이 부회장에게 있다. 조직 구성원들의 인센티브 구조가 왜곡되었다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 변화를 위해서는 보상과 문책의 기준부터 바꿔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바뀌고, 조직이 바뀐다.

그렇다고 해서 총수일가와 가신들의 개과천선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왜곡된 인센티브 구조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을 바꾸려면, 올바른 행동에는 보상을 주고 그릇된 행동엔 책임을 묻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채권자(은행)와 노조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는 주주의 몫이다. 특히 기관투자가들이 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해야 한다.

이형근 기아자동차 대표이사 부회장이 20일 오전 서울 양재동 사옥에서 열린 제71차 정기 주주총회에 의장 자격으로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_ 연합뉴스


그런 의미에서 금융위가 올해 업무계획에 명시한 ‘한국판 Stewardship Code 제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관투자가들이 주총 안건에 수동적으로 찬반을 표시하는 차원을 넘어, 평상시에 피투자회사 경영진과의 대화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필요하다면 사외이사 후보도 추천하고, 마지막 수단으로는 소송을 제기하거나 경영진을 교체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의 주주권을 행사하는 원칙과 절차를 정립하고 그 결과를 공시하도록 하는 모범규준을 말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에서는 강화된 규준이 시행되었고, 최근에는 아시아 국가들도 대부분 도입했다. 우리만 안 했다. 달리 지배구조 후진국이 아니다.

주주권은 일 년에 하루만 행사하는 권리가 아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된 주주권 행사 모범규준을 만들어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게 해야 한다. 내년 3월에는 주인과 대리인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주총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김상조 |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