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디테일에 숨은 악마를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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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제칼럼

[편집국에서]디테일에 숨은 악마를 찾아내야 한다

by eKHonomy 2017. 12. 15.

“내년에는 공장을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옮기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걸핏하면 해외 이전을 들먹이며 정부를 겁박하던 대기업의 얘기가 아니다. 휴대전화 부품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소규모 회사를 경영하는 지인의 하소연이었다. 그는 내년 최저임금이 시간당 7530원으로 인상되면 인건비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인건비 부담이 16% 넘게 늘어나면 납품단가를 최소한 10%는 올려야 수지타산을 겨우 맞출 수 있다. 그런데 납품단가 올려달라고 하면 대기업이 거래선 바꾸겠다고 할 게 뻔하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 정부가 3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 1인당 보조금 13만원을 매달 지급하기로 한 지원책에도 마뜩잖아했다. “정부 정책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믿을 수 없다. 지금 정권이 계속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지 않으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7개월을 넘어섰다. 여러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특히 경제 분야는 중점을 두고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7월 경제정책 방향에서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일자리 중심 경제·혁신 성장·공정 경제 등에 초점을 맞춰 경제 패러다임을 전환하겠다고 했다.

 

대기업과 고소득자 등 ‘이대로’를 외치던 일부 부유층을 제외한 대부분 시민은 이 같은 취지를 환영했다. 하지만 결과는 엉뚱한 방향에서 먼저 나타나고 있다. 당장 최저임금 인상을 두고도 오히려 질 낮은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일부 우려가 현실화할 조짐을 보인다. 목표와 방향을 올바로 설정했더라도 구체적인 전략과 실행 방안이 뒤따라야 하고 이행 상황까지 점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대상 기업이나 자영업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지인 주장대로 인건비는 상승하는데 대기업 납품단가는 그대로라면 감당하기 어렵다. 편의점도 사정이 비슷하다. 가맹본부 수수료율이 같다고 가정했을 때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편의점주 순수입은 올해보다 14%가량 줄어든다는 분석이 있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 결정 이후 보조금 같은 일시적 대책만 내놓을 게 아니었다. 이해당사자가 신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시스템 구축이 필요했다. 대기업 납품단가나 가맹사업본부 수수료율 조정과 같은 방안이 해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최저임금 인상으로 시민생활 개선에 도움을 주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커 보이지 않는다. 무책임한 ‘쇼’에 가까운 것 같다.

 

통계청의 영리기업 일자리 1918만개에 대한 통계를 보면 지난해 기준 대기업 일자리 비중은 19.2%, 중소기업은 80.8%였다. 게다가 종사자 50인 미만 기업 일자리는 전체의 절반을 넘는 52.4%에 이른다. 최저임금의 직접 영향을 받는 노동자는 그만큼 많다.  

 

대기업인 신세계가 내년 1월부터 주당 35시간 근무제를 하겠다고 밝혔다. 임금을 삭감하지 않으면서 하루 7시간 근무제를 도입하겠다고 하니 역시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부담을 교묘하게 피하려는 꼼수가 숨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휴식이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최저임금 언저리 노동자라면 한푼이라도 더 받는 것 또한 중요하다. 예컨대 대형마트에서 계산이나 정리를 담당하는 무기계약직은 최저임금이 인상돼 임금이 올라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내년부터 노동시간이 한 시간 줄어든다면 기대한 만큼 임금 인상 효과를 볼 수 없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최저임금 인상은 사회가 좋아질 것이라는 총론에서 출발했다. 다만 정부는 각론(디테일)에 소홀해 구체적인 이행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고, 부작용이 현실화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이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상쇄할 수도 있다. 디테일에 숨었던 악마를 소환한 셈이다.

 

이상적인 상황은 최저임금 인상 이후 대기업이 자발적으로 납품단가를 올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경험상 기대하기 어렵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파고들어 이익을 챙기는 집단 아닌가.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2일 LG그룹 관계자와 간담회를 가졌다. 이례적인 일이라고는 하지만 자주 만나야 한다. 정부가 정책을 만들고 내놓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현장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추상적이거나 이념뿐인 경제정책은 공염불이다. 실용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안호기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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