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고시원, 쪽방이나 노숙인 밀집 지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있을까 신경이 곤두서 있다. 고위험군이 많은 것도 걱정이지만 그보다 확진자 발생이 불러올 차별이 더욱 두렵다.
한 달 전 서울역에서 상담 활동을 하던 한 활동가의 등뒤로 물총이 난사되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헬멧을 쓴 2인조가 노숙인을 향해 물총을 쏘고 빠르게 지나갔다. 잠시 뒤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노숙인에게 다시 물벼락이 날아왔다. 수치심과 억울함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경찰에 신고한들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개인방송을 하는 사람들은 서울역에 자리를 깔고 과장된 차림새로 ‘노숙 체험 라이브’를 하거나 노숙인을 몰래 촬영하기도 한다. 밥이나 한잔 술에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영상이 어떻게 편집되어 누구에게 보여줄 것인지 조율할 수 있는 경험과 권한은 없다. 일부 나쁜 치는 악의적인 질문을 던지거나 시비를 걸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상은 노숙인에 대한 가짜정보를 유포하고 노숙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개개인의 고유한 특징과 정체성을 완전히 휘발시켜버리고 ‘노숙’이라는 상태만 남기는 이 콘텐츠들은 노숙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다.
최근 특정 교회 신도들의 행각이 연일 보도된다. 안전을 지키려는 공동체의 노력을 해체한 이들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뉴스를 보며 분노하다 보면 우리는 이들을 제거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환상과 욕망을 감추기 어려워진다. 과연 그럴까. 지난 3월 서울의 한 철거현장에 투입된 철거용역 역시 ‘너도 코로나 줄까’라며 철거민들에게 침을 뱉었다. 폭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에게 감염병은 평등한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위협의 수단이 되기 쉽다.
감염의 두려움 속에서도 숙의해야 할 시간이다. 모두가 안전할 때 당신도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이 코로나19의 가르침이라면 모두가 안전한 조건을 만드는 것, 경제적 지위나 병력, 정체성에 의한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더 나은 선택이다. 최근 여러 집단의 무책임한 행동을 보며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 확산 당시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감행한 방역 협조가 얼마나 빛나는 선택이었는가 절감한다.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물총 난사를 처벌할 수도, 인터넷 개인방송을 규제할 근거도 적다. 차별금지법도 이를 처벌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차별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나 혐오를 유포하는 방송에 대해 송출 미디어가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차별의 존재를 시인하는 작은 시작을 위해 차별금지법이라는 더 나은 선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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