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는 막을 내리고 정부나 공적 관리기구의 책무가 막중해진 시대가 도래했다. 한 나라 안에서뿐만 아니라 지구 안에서도 그렇다. 기후위기로부터 하나의 지구를 책임질, 하나의 관리기구의 막중한 책무에도 합의해야 할 때다. 국가 간의 경쟁적 법인세 인하와 다국적기업의 조세회피 같은 무책임한 이기주의는 위기에 취약한 글로벌 경제로 치닫는 길이라는 것을 지금이라도 깨닫게 된 것은 다행이다. 국가 간의 경쟁적 탄소배출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코로나19 사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재정확장이 이어지고 있다. 그로 인해 자산시장이 과열되었고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가치는 계속 부풀어 오르고 있다. 한국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주택가격이 사상 최대로 치솟았다. 자산 불평등 역시 크게 악화될 수밖에 없다.
미국 재무장관 재닛 옐런이 이달 초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법인세 최저세율을 21%로 설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도 찬성 의사를 밝혔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 기업들이 세율이 낮은 조세회피처를 이용할 수 없도록 이른바 구글세를 도입하자는 제안도 나왔고 미국과 유럽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지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도 유럽연합(EU)을 주축으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국제공조가 논의됐지만 미국의 소극적 태도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구글세에 대해서도 트럼프 정부 시절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바이든 정부는 글로벌 최저 법인세율과 구글세 모두에 전향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래로 오랫동안 지속된 양적완화의 후유증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정부부채의 급속한 상승에 대한 우려가 국제 공조로 나타난 것이다.
지난주 바이든 행정부가 꺼낸 ‘부자증세’안은 더 놀랍다. 10억원 이상의 자본이득에 대해 현재 20%의 세율을 두 배가량 높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올린 세수로 교육과 아동복지 등 재분배 정책에 쓴다고 한다. 법인세율 역시 28%까지 올린다는 계획도 제시됐다. 코로나19 사태로 심화된 불평등을 해소하고 코로나19 이후 에너지전환과 디지털전환에 대비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이런 세계적 대세에 거스르는 역주행을 하고 있다. 세 부담이 낮아서 걱정해야 할 나라에서 수십억, 수백억원대 자산을 가진 부자들의 세 부담은 물론이고 재벌의 상속세, 증여세까지 걱정하고 있다. 한심한 노릇이다. 모든 소득에 공평히 과세해야 하고 국민에게는 납세의 의무가 있다. 모든 범죄자는 응당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이런 법치국가의 기본원리가 전직 대통령, 재벌가 인사 등과 같은 ‘최고 시민’은 사면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식을 공공연히 퍼트리는 무리들이 정치·경제·언론을 농단하고 있으니 부유층의 공정과세에 대한 의식 또한 흐릿할 수밖에 없다. 선거에서 참패한 여당의 일부 의원들도 보유세 감면안을 서둘러 만들고 있다.
한국은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가 지난 20여년간 급속히 진행됐다. 자산소득, 특히 부동산소득이 소득불평등 악화에 큰 역할을 한다. 주택가격과 주택시장 규모도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할 때 매우 높은 수준이다. 그만큼 자산불평등이 심각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 사태는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있다. 강제폐업으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손실은 불어났고 반면 자산 소유자들의 자산가치는 급등했다. 전쟁 같은 재난 상황에서는 고통분담이 필요하다.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 가릴 것 없이 고통분담을 위한 증세 안을 마련할 좋은 기회다.
그동안 턱없이 낮은 부동산 보유세에 익숙했던 부자들을 달래기보다는 늘어난 보유세 걱정조차 부러운 서민들의 불행에 귀 기울여야 한다. 다른 선진국 수준으로 보유세를 높이는 것은 과세의 형평성으로 보나, 효율성으로 보나 당연히 가야 할 방향이다. 장기적으로 적정한 세 부담이 이루어지도록 법인과 개인 소유 부동산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정책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지금처럼 유례없는 팬데믹 상황에서는 특단의 한시적 누진과세 조치까지 논의돼야 한다. 가령 자산소득 최상위 5%의 부유층에 대한 세율을 한시적으로 인상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다수의 국민들이 유례없는 재난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더 부유해질 수 있었던 사람들이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법인세와 소득세 역시 한시적으로 누진세율을 높이는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사람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나라가 있어야 부자도 있는 것이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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