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제 관련 뉴스는 우울한 내용투성이다. 분기 성장률이 5분기 연속 0%대로 떨어졌고, 국민소득마저 줄어들고 있다. 이미 저성장 시대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쏟아진다. 가계빚은 1100조원을 넘어섰는데, 금리는 곧 오를 것으로 보인다. 한국 경제의 자랑이었던 수출은 증가율이 6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 주식시장은 2011년 5월의 사상 최고치(2228.96)를 4년 넘도록 회복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젊은이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고령화 심화와 인구 감소 등 향후 경제 여건이 개선될 기미도 불투명하다.
모처럼 밝은 경제뉴스가 떴다. 며칠 전 KB, 신한, 하나 등 3대 금융그룹 회장들이 연봉의 30%를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산하 계열사 임원들도 직급별로 10~20%를 내놓기로 했다. 반납한 재원은 계열사 인턴, 신입 및 경력직 사원 등 신규 채용에 쓴다고 한다. 금융회사 경영진이 임금 일부를 자진 반납한 사례는 전에도 있었지만 경영난이 주된 이유였다. 금융그룹 회장들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며 연봉을 반납하기로 한 것은 처음이다.
KB금융의 한 임원은 “회장을 비롯해 전무급과 계열사 부사장급 이상 임원 40여명이 2017년까지 연간 20억여원씩 반납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3대 금융그룹의 연간 연봉 반납분은 70억원으로 추산하는데, 연간 300여명씩 3년간 1000명가량을 신규 채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다만 연봉 반납분으로 새로 뽑는 직원 1인당 평균 연봉은 2333만원으로 인턴 위주이다. 양질의 일자리는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언론은 여러 의혹을 쏟아냈다. 윗선 지침을 받은 금융당국의 압력을 받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따랐을 것이다. 삭감이 아닌 반납이니 일정 기간이 지나면 반납분을 다시 챙겨갈 게 뻔하다. 구조적인 취업난을 해결할 수 없는 임시방편이다. 새 일자리는 임시직과 비정규직만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음모와 꼼수가 판치는 세상이지만, 믿어보자. 사회적 책임감을 느껴 자발적으로 연봉을 반납하기로 한 회장님들의 결정을 환영한다. 3대 금융그룹 회장들의 발표 이후 지방 금융그룹 3개사 회장들도 연봉 20%를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보험업계도 연봉 반납을 거론하고 있다.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_경향DB
금융업계가 시작한 일자리 나누기가 전 산업계로 확산되면 어떨까.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한 연봉 5억원 이상 등기임원은 지난해 기준 49개 대기업집단 347개 기업의 288명이었다. 연봉은 평균 12억3900만원씩 총 3570억원에 이른다. 이들이 30%씩 연봉을 반납하면 금융그룹처럼 연봉 2333만원인 직원 4500명을 신규 채용할 수 있다. 146억원을 받아 최고액 등기임원이었던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 한 사람이 결심하면 187명에게 일자리를 나눠줄 수 있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나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 재벌가 임원들도 비등기라는 방패 뒤에 숨지 말고 떳떳하게 연봉을 공개하고 동참한다면 더 많은 일자리가 돌아간다. 국세청 통계를 보면 2013년 근로소득이 5억원을 초과한 근로소득자 1832명의 근로소득은 2조4569억원이었다. 30%를 떼면 3만1500여명이 직장을 구할 수 있다.
임원뿐 아니라 대기업이 투자하지 않고 쌓아둔 자금을 활용하면 효과는 더 커진다. 30대 그룹 사내유보금 710조원의 1%만 써도 일자리 30만개가 생겨난다. 지난 7월 기준 15~29세 청년실업자 수는 41만6000명이다. 청년실업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
물론 몇몇 사람이 갹출하듯 연봉을 반납해 일자리를 나누는 것은 근본적인 취업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좋은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늘리려면 새로운 성장산업을 발전시켜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한국 경제는 여전히 수출과 제조업 중심에 머물러 일자리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 고용유발 효과가 큰 서비스산업은 단기간에 성장하기 어렵다. 정부도 해법을 알고는 있지만 눈앞의 성과에 집착하느라 선뜻 실행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자리 나누기를 위한 연봉 반납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보다 훨씬 좋지 않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한국인의 연간 노동시간은 2163시간으로 멕시코에 이어 두번째로 많다. 중간 임금의 3분의 2에 못미치는 저임금자 비중은 최하위권인 24%이다. 일자리를 나누면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임금 불균형도 일부 해소할 수 있다.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여가 시간이 늘어나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 성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경기 침체와 취업난 심화 악순환 우려 대신 일자리 나누기에서 촉발된 한국 경제의 선순환을 기대해 본다.
안호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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