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이다. 1997년 11월22일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우리 경제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담화에서 김 대통령은 “고도성장으로 인해 구조적인 문제가 잉태됐고 대기업 주도의 공업화 전략이 더 이상 성장전략 실효성을 가질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시민이) 합심해서 고통을 참으면 더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며 자기희생과 고통분담을 호소했다. 한국은 곧이어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체제에 들어갔다.
국가는 시민을 안전하게 보호할 책무가 있다. 여기서 안전은 외부의 침략이나 타인의 폭력뿐 아니라 실업, 빈곤, 산업 재해, 소득 없는 노령, 경제적 강자의 착취 등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한다. 최저생활을 지켜 인간다운 생활을 하도록 보호할 의무다. 이는 대한민국의 헌법에 명시된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다. 헌법에서는 국가공동체의 최고 목표로 자유, 복지, 평등, 안전, 평화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가 지켜야 할 의무의 ‘포기선언’을 한 것이다.
(출처: 경향신문DB)
외환위기는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개발연대의 평생직장 신화는 종말을 고했다. 자고 일어나면 부도업체가 생겼고 실업자가 쏟아졌다. 고도성장은 전설이 되었다. 일자리를 잃고 집을 나온 노숙자들로 역사와 공원은 넘쳤다. 실직은 가정의 파탄으로 이어졌다.
그 후 20년이 흘렀다. 국가는 달라졌을까. 한국은 2년 만에 IMF 관리에서 벗어났다.
1997년 1인당 국내총생산은 1만달러에도 못미쳤으나 올해는 3만달러에 육박한다.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감안할 때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낙제점은 아니다. 국가신인도는 1997년 말 투기등급인 B+까지 떨어졌으나 11단계나 상승했다. 영국·프랑스와 같은 ‘AA’(세번째 높은 등급)로 올라섰다. 외환보유액은 1997년 말 204억달러에서 지난달에는 3844억달러로 늘어났다. 괄목할 성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외양일 뿐이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비정규직은 일상화됐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해마다 늘어 800만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직업안정성이 위협받고 임금도 차별을 받는다. 이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러니 분배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일자리 부족의 직격탄은 실업률의 증가로 이어졌다. 특히 청년들의 체감실업률은 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청년들에게 헬조선은 그들이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다. 정부가 수십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하고도 출산율 제고에 실패한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캄캄한 터널 속에서 누가 미래를 꿈꿀 수 있겠는가.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성장률에 목을 맸다. 일단 파이를 키우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다. 물론 파이를 키우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분배는 별개의 문제다. 정부는 대기업을 육성하면 중소기업과 가계에 이익이 흘러가고 다시 기업으로 돌아오는 선순환을 기대했다.
그러나 부는 한 곳에서 고여 아래로 흐르지 않았다. 모든 혜택은 대기업과 대기업 종사자들에게 집중됐다. 대기업들은 기를 쓰고 돈을 곳간에 쌓았고 이것은 700조원에 육박한다. 그사이 가계의 빚은 1400조원을 넘었다. 화려해 보이는 국가의 성장은 가계빚으로 쌓아올린 모래성이 되었다. 편식은 위험하지만 편식경제는 지속되고 있다. 이것이 지난 20년간 국가가 해온 일이다.
플라톤이 설파했듯 국가의 존재 목적은 정의의 실현이다. 달리 말하면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다면 국가의 존재 이유는 상실되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국가는 시민을 배신했다. 진보와 보수정권 어느 한 곳도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지 않은 정권이 없다.
국가는 시민에게 인내를 요구하고 장밋빛 미래를 말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인정받는 사회다. 그것이 국가 정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공수표로 끝났다. 외환위기 때 시민들은 나라를 위해 금모으기를 하면서 고통을 감수하고 위기극복에 동참했다. 그런데 국가는 시민의 고통에 눈감았다. 시민들은 다시 위기가 왔을 때 또 그전처럼 나설까. 두 번 속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저항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시민이 물리적 폭력에 시달리지 않도록 보호하더라도 경제적 권력의 오용에서 시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국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국가는 어느 누구도 굶어죽거나 경제적 파멸이 두려워 불평등한 관계에 빠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열린 사회를 꿈꾼 철학자 칼 포퍼의 말이 이상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이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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