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우리는 위기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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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제칼럼

[경향의 눈]우리는 위기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by eKHonomy 2017. 1. 5.

올해는 외환위기를 맞은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위기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분별력을 낳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도 빈말이었는지 다시금 위기를 걱정하는 처지에 놓였다. 국정 리더십은 붕괴되었고 앞길은 안갯속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위기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20년 전 위기는 ‘크리스마스의 악몽’으로부터 시작됐다. 1996년 12월25일 밤 신한국당 의원들이 군사작전을 하듯 4곳의 시내 호텔에 집결했다. 이어 다음날 새벽 국회에 잠입해 11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7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른바 노동법 날치기 사건이다. 야당은 항의농성, 노동계는 총파업에 들어갔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다음해 초 정부는 이를 백지화했고 김영삼 정부는 ‘식물정부’가 됐다. 위기의 발단은 리더십의 붕괴였다. 투기자본은 위기 수습능력을 상실한 한국 경제에 승냥이처럼 달려들었고 결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97년 체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제와 삶을 강요했다. 평생직장의 신화는 깨졌고 구조조정, 명예퇴직은 일상화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편가름이 확대됐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일상이 팍팍해졌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7600달러선까지 떨어졌다가 2만 7000달러까지 회복했으나 서민들은 온기를 느끼지 못한다. 2008년 이후에는 저성장과 불확실성의 뉴노멀에 발목이 잡혔다.

 

 

2017년 새해가 밝았지만 국정 리더십은 공백 상태다. 리더는 있으나 리더십은 손발이 묶였다. 코앞에 닥친 현안은 하나같이 숨이 막히는 것들인데 대통령은 국정농단으로 유폐된 상태다. 20년 전 상황의 기분 나쁜 데자뷔이다. 외신도 하나같이 권력공백 장기화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올 상반기까지는 이 상황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파열음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촛불에 가려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경제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당장의 문제라기보다는 장기적으로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요즘 거리에는 ‘인형뽑기방’이 유행이라고 한다. 무슨 업종이든 잘되면 좋은 것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가게들이 수없이 망하고 그 자리에 새 가게가 들어서기 전까지 빈자리에 인형뽑기방이 들어선다는 것이다. 불황의 지표업종인 것이다.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넋 놓고 있다가 경제의 체질 개선에 실패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2017년 경제정책방향에 대해 “20조원 이상을 쏟아부어 경기를 살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경제 전반의 활력을 살리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 한 땜질식 처방일 뿐이다.

 

밖으로 눈을 돌려도 녹록지 않다. 미국을 제외한 주요국의 경기는 저성장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마다 혼자만 살아보겠다며 자국 제일주의로 돌아서면서 칸막이를 높이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에 국제적 여건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우리만 열심히 노력하면 극복가능한 환경이었다. 이젠 이마저도 기대할 수 없다. 재계가 신년사에서 빠짐없이 ‘위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특히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문제는 우리에게 막다른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행 관광객이 타는 전세기편의 운항을 불허했다. 중국은 한한령을 내려 한국 관련 비즈니스 중단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 제1의 교역국이다. 북한과의 대치 상황에 한국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외환위기 20년을 맞는 올해 더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아포리아’ 상태인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를 ‘아포리아’라고 했다. 위기보다 더 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를 말한다. 도시국가 연맹체였던 그리스가 페르시아제국의 200만명이 넘는 군대에 맞서야 했을 때 느꼈던 그 위기감이다. 당시 위기 극복의 원동력은 용기와 희생정신을 가진 시민과 지혜로운 지도자였다. 그리스의 어머니는 전투를 떠나는 아들에게 “당당히 방패를 들고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방패에 실려 오라”며 용기를 북돋웠고, 지혜로운 지도자는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위기를 넘겼다. 

 

우리는 한동안 지도자의 리더십을 바랄 수 없다. 새 지도자가 나온다 해도 경제개혁은 바라기 힘들다. 경제개혁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촛불로 고무된 시민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유권자들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한다. 자기희생은 회피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위기다. 우리는 과연 위기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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