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재벌개혁 또 빈말로 그쳐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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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제칼럼

[사설]재벌개혁 또 빈말로 그쳐선 안된다

by eKHonomy 2017. 1. 3.

지난 50여년간 한국 경제는 재벌과 함께 성장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큰 재벌은 압축성장의 핵심축이었다. 정부는 친대기업의 산업·금융정책을 적극 펴며 재벌의 확장을 도왔다. 이를 통해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고 선진국과 경쟁할 수준까지 도달했다. 대기업의 성장을 기반으로 한 국가경제의 발전이 시민들의 경제력 향상에 기여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재벌 중심의 성장전략이 성공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그동안 대형 제조업체들은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로 약진했지만 정점에 이르렀다. 신속한 따라잡기를 위한 응용기술 지향이 주는 유리한 입지가 사라진 것이다. 이제는 ‘퍼스트 무버(선도자)’의 시대, 혁신가의 시대다. 재벌 주도 성장전략을 폐기해야 한다.

 

재벌은 몸을 주체할 수 없는 공룡이 되었다. 30대 재벌그룹은 한국 기업 총매출의 약 40%를 차지하며, 국가 총자산의 37%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자산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95%이며 금융위기 이후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재벌그룹 가운데서도 4대 그룹과 나머지 그룹 간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이렇다보니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대통령이 재벌 총수에게 투자와 일자리를 구걸하게 된다. 그러나 재벌이 몸집을 불리는 과정은 편법과 탈법으로 얼룩져 있다. 순환출자라는 마법을 통해 쥐꼬리만 한 지분으로 계열사를 수십개로 늘린다. 재벌이 창업주에서 2세, 3세로 세습되는 과정에서는 더 큰 마법이 동원된다. 루프홀(법률상 허술한 구멍), 일감 몰아주기, 인수·합병, 상장 등의 방식으로 수십억원의 종잣돈이 수조원으로 증식되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기대했던 낙수효과는 사라졌고 양극화는 심화됐다. 대기업에 부가 집중되고 있으나 기업 안으로만 고이고 밖으로 흘러내리지는 않고 있다. 30대 그룹 내에 쌓아둔 사내유보금이 750조원을 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격차는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1월3일 (출처: 경향신문DB)

 

현재 재벌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경제력 집중’과 ‘불투명한 소유·지배구조’로 요약된다. 재벌그룹은 끊임없이 확장을 거듭하며 사회 전반에 걸쳐 지배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술혁신은 정체되고 시장지배력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면서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그리고 계열사 간 출자를 통해 낮은 주식 소유 비율로도 총수 가족들이 경영권을 확보하는 후진적인 소유구조에 머물고 있다. 계열사 확장의 욕구와 경영권 세습은 정경유착의 유발요인으로 작용했다. 재벌개혁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요 의제로 부상했으나 보수·진보 정권 모두에서 무위로 끝났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드러난 정경유착은 다시 재벌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재벌을 향한 시민의 분노는 비등점에 이르렀다. 전경련 해체 요구가 나오고 있으나 이는 재벌개혁의 시발점에 불과하다. 전경련은 정경유착을 통해 공정한 시장경쟁을 훼손해왔다. 정권과의 유착을 위해 전경련이 불법 모금에 나선 사실이 5공 청문회와 대선자금 수사 때 밝혀진 바 있다. 그때도 재벌은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 모금과정에서 보듯이 같은 불법을 또 저질렀고 다시 재발 방지를 다짐했다. 이런 지겨운 반복을 끊으려면 전경련 해체를 신호 삼아 재벌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국회는 이달 초 임시국회를 열어 재벌개혁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소수주주권 강화를 위한 전자·집중투표제, 회사에 손실을 끼친 경영진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주주대표소송제와 다중대표소송제, 감사위원의 독립성 확보를 위한 분리선출 등을 포함한 상법 개정이 핵심이다. 다중대표소송제는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이 도입을 약속했으나 재계의 반발로 흐지부지된 사안이다. 여야가 합의해 통과시키길 기대한다. 이와 함께 총수일가의 사적 이익 편취를 막기 위한 공정거래법 개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재벌개혁 논의는 대부분 재벌의 소유지배구조 개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재벌개혁의 핵심은 경제력 집중 문제여야 한다. 총수 집행유예 금지 조항 도입부터 일감 몰아주기 규제,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시장지배적 사업자 기준 강화, 의무공개매수제 도입 등 의견이 다양하다. 그만큼 효과적인 해결책에 합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스라엘 정부의 재벌개혁 경험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 해소를 위한 위원회를 설치해 3년간 준비하고 연구했다. 이를 통해 마련된 개혁안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벌개혁이 50여년간 뿌리 깊은 문제를 다루는 만큼 정부와 정당, 학계 등이 참여하는 ‘사회적 논의기구’를 구성해 추진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재벌개혁의 목표는 기업에 공정한 기회, 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동이 가능한 시장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기업가에게 혁신정신을 불어넣어 지속가능한 성장의 길을 여는 것이다. 이 기회를 또 놓친다면 한국 경제와 시민의 삶은 영영 병든 공룡 재벌의 인질로 붙잡혀 있을지 모른다. 시민들이 적극 응원하고 있다. 매번 빈말로만 그친 재벌개혁을 이번에는 꼭 이루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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