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카피캣과 영업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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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제칼럼

[경향의 눈]카피캣과 영업비밀

by eKHonomy 2013. 10. 28.

스티브 잡스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삼성전자를 ‘카피캣’(모방꾼)이라고 불렀다. 삼성의 베끼기 탓에 손해를 봤다는 얘기다. 삼성전자는 반도체와 액정화면, 배터리 할 것 없이 전자부품 사업에서 세계 최고의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자랑한다. 애플도 삼성 손을 빌리지 않고는 아이폰을 만들 수 없을 정도다. 애플이 신제품을 내놓기 전에 가장 먼저 노출되는 곳도 삼성전자다. 부품을 주문하려면 방법이 없다. 카피캣이란 단어 속에는 잡스의 이 같은 의구심이 배어 있다. 영업비밀이 노출됐다는 일종의 피해의식이다. 잡스는 이 논리를 앞세워 그동안 톡톡히 재미를 봤다. 주가 하락이나 혁신성이 떨어졌다는 주주들의 반발을 피해가는 데 삼성과의 소송을 역이용한 측면도 있다. 잡스는 떠났다. 그의 영업비밀에 대해 이야기해줄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영업비밀로 재미를 본 것은 잡스만이 아니다. 한국 재계만큼 영업비밀을 앞세우는 곳도 드물다. 뭔가 불리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으레 영업비밀이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한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대선과 박근혜 정권 초반기를 달군 경제민주화 열기는 이제 끝물이다. 박 대통령은 어제도 “규제를 완화해 투자 의욕을 되살리겠다”고 말했다. 대선 때 약속한 경제민주화는 오간 데 없다. 최근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도 기자들과 만나 “우리 할 일은 다했다”고 했다. 개혁 피로감과 영업비밀을 앞세운 재계의 논리가 먹혀들고 있는 셈이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인 일감 몰아주기 규제와 갑을관계법, 상법 개정안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도대체 뭘 다했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장도리]2013년 7월26일 (출처 :경향DB)



일감 몰아주기의 폐해는 다시 얘기할 필요조차 없다. 국회 국감자료를 보면 지난 한 해 국내 7개 대기업이 계열사에 몰아준 광고물량만 2조원을 넘는다. 삼성과 한화는 전체 그룹 광고의 98%를 계열 광고회사에 몰아줬다.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다. 일감 몰아주기는 주주 이익을 빼돌리는 엄연한 불법 행위다. 오너 일가의 편법 대물림에 악용돼 왔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사정이 이런데도 재계는 영업비밀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대표적인 예로 전산 관련 시스템통합(SI) 업체를 꼽는다. 삼성SDS와 SKC&C, LGC&S 같은 회사다. 알다시피 삼성SDS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편법 경영권 승계 과정에 종잣돈을 대준 회사다. SKC&C는 최태원 회장에게 수조원의 시세차익을 올려줘 규제의 필요성을 일깨운 회사다. 그렇다면 재계가 내세우는 영업비밀 논리는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일감몰아주기 규제 관련 정부.여당 발언 변화 (출처 :경향DB)


김해 연지공원 뒤 야산에는 야트막한 3층짜리 건물 하나가 솟아 있다. 겉모양은 일반 건물과 별반 다를 게 없지만 건물 주변은 온통 폐쇄회로(CC)TV로 둘러싸인 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지난해 문을 연 KT의 데이터센터다. 이곳에는 일본 소프트뱅크가 관리하는 40여개 주요 기업의 각종 전산자료가 통째로 보관돼 있다. 데이터센터는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의 아이디어다.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컴퓨터 서버를 안전하게 보관할 곳을 물색하던 차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한국을 찾게 된 것이다. 전산 영역은 기업비밀이라 다른 곳에 맡길 수 없다는 재계의 논리를 생각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핵심 자료를 경쟁회사에 맡기는 것도 모자라 물 건너 남의 나라에 보관한 소프트뱅크는 과연 뭔가.


이뿐만이 아니다. IBM은 아예 고객사의 정보 관리와 서비스로 먹고사는 회사다. 한때 세계 최대 PC 업체였던 IBM이 소프트웨어·서비스 업체로 변신한 것은 놀라울 정도다. DHL이나 일본 미쓰비시, 인도 통신회사 바르티(Barti) 같은 유명회사가 이 회사의 주 고객이다. 이들 중 영업비밀이 노출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곳은 없다. 한국 기업 논리라면 IBM은 나오지 말았거나 이미 망했어야 할 회사다. 현대·기아차가 광고회사인 이노션을 만든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그 전에는 삼성이나 LG 계열 광고대행사가 광고를 맡았다. 이제 와서 “신차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며 영업비밀을 얘기하는 것은 또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를 금지하는 공정거래법 시행령이 입법예고 중이다. 시한은 2주가량 남았다. 총수 일가 지분이 30%와 20% 이상인 상장·비상장 기업을 대상으로 하되 거래 규모·조건을 느슨하게 적용해 상당수 기업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돼 있다. 또 효율·보안·긴급성을 요구하는 경우도 예외로 인정해준다. 영업기밀을 앞세운 재계의 요구가 반영돼 대기업 전산업종도 예외를 인정받는 모양이다. 현대차의 물류기업인 현대글로비스도 효율성 측면에서 규제 대상에 제외된다고 한다. 차 포 떼고 장기판에 졸만 남은 격이다. 이들 업체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왜 필요한지를 입증한 주범 격이다. 하지만 정작 규제해야 할 대상은 빠지고 엉뚱한 기업만 덤터기를 쓰게 된 꼴이다. 잘못된 규정은 바로잡아야 한다. 일감 몰아주기를 빼고 경제민주화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박문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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