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망하지 않는 한 들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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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제칼럼

[경향의 눈] 망하지 않는 한 들통나지 않는다

by eKHonomy 2011. 5. 16.
서배원|논설위원


‘재벌 총수가 직접 건네는 돈은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관치금융이 횡행하던 시절 정계·금융계에 두루 통했다. 총수의 부하들은 여차하면 수사기관에 불려가 입을 열 수 있지만 총수는 그럴 염려 없으니 그의 뇌물은 뒤탈이 없다는 얘기다. ‘재벌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 심리도 깔려 있다. 이런 믿음은 필연적으로 죄의식을 마비시킨다.

1996년 7월 어느 날 당시 제일은행장은 서울의 한 특급호텔 주차장에서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에게서 사과상자에 담긴 현금 2억원을 건네받았다. 조흥은행장도 같은 달, 같은 장소에서 같은 액수가 담긴 사과상자를 받았다. 사과상자는 그 해 9월 두 행장에게 한 차례 더 건네졌다. 이른바 대출 커미션이었다. 이때만 해도 두 행장은 자신들의 뇌물수수 사실이 들통나 쇠고랑을 차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먹어도 안전한 총수의 뇌물’에 아주 드물게 예외가 있다. 재벌이 망하는 경우다. 그 예외가 1997년 1월 현실화했다. 국내 2위 철강회사이던 한보철강이 부실의 늪에 빠져 부도를 내면서 한보그룹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재벌이 은행 빚으로 성장하던 시절이라 재벌에서 은행으로, 은행에서 정치권력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이 공고했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지 며칠 만에 가장 먼저 두 행장에게 쇠고랑을 채웠다. 1차 수사에서만 장관 1명, 국회의원 4명, 은행장 3명이 구속됐다. 한보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비리다.

저축은행들 문닫자 비리 쏟아져

부산저축은행 계열의 5개 저축은행이 문을 닫았다. 수사가 시작되자 저축은행 대주주와 저축은행의 상전인 금융감독원의 비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저축은행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드러나지 않았을 비리들이다.
저축은행 대주주들의 불법·비리를 보면 그들이 운영한 것은 금융회사의 탈을 쓴 부실투성이 부동산 투자회사였다. 100여개의 특수목적법인을 세우고 부동산 투자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부실이 커지자 분식회계로 예금주의 눈을 가렸다.
금감원은 감독기구가 아니라 감독해야 할 대상의 불법·비리를 눈감아주고 금품을 받아 챙긴 집단으로 비쳐진다. 금감원 출신 감사는 저축은행 대주주의 하수인이나 다름없었다.

비리의 구조적 양태를 보건대 저축은행 대주주나 금감원 직원의 도덕성과 죄의식은 철저히 마비됐음이 분명하다. 부동산 경기만 회복되면 모든 부실이 해결되고, 금감원 출신 감사와 돈으로 금감원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대주주의 도덕성과 죄의식을 마비시켰을 것이다.
금감원과 저축은행의 유착 고리가 건재하는 한 저축은행이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금감원의 상전인 감사원 감사쯤은 얼마든지 바지저고리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금감원 직원의 도덕성과 죄의식을 마비시켰을 것이다.

망해야만 들통나는 사회 구조는 전형적인 후진형이다. 나무가 쓰러져 토막나기 전까지는 얼마나 썩었는지 도무지 드러나지 않는 구조로는 부패를 막을 수 없다. 실제로 지금까지 저축은행 부실이 문제가 되면 공적자금을 집어넣고 다른 저축은행에 인수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주주의 책임을 묻는 경우는 있었지만 부실 감독 책임 문제로 금감원에까지 불똥이 튀는 경우는 없었다.

후진적인 사회 시스템의 전형

금감원이 중병에 걸렸음을 알리는 전조(前兆)는 많았다. 날이 갈수록 낙하산 감사 관행에 대한 경고음이 커지는데도 금감원은 이를 무시했다. 금융회사에 금감원 출신 감사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식의 눈가리고 아웅하는 논리로 유착의 고리를 감쌌다.
낙하산 감사를 받아주기 위해 연례 행사인 주주총회를 며칠 사이에 두 번 여는 금융회사도 있었다. 금감원 출신의 감사 후보에 대한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 승인 심사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다. 이 정도면 도덕적 해이가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이런 일도 있었다. 부실 저축은행이 무더기로 영업정지된 뒤 저축은행 부실 책임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3월 말 금감원은 <변화로 통하다:금감원 이야기>란 책을 펴냈다. 널리 알려달라는 보도자료까지 냈다. 김종창 금감원장이 퇴임하기 며칠 전이다.
‘금감원, 국민과 통하기 위해 권위를 벗고 변화의 옷을 입다’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김 원장이 지난 3년간 금감원 혁신에 매진해 ‘고도의 전문성과 신뢰받는 금융감독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내용이다. 망하지 않으면 들통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깨져야 하는데 그리 쉽게 될 일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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