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형에게.
칼럼 마감 전날 찾아오는 은근한 긴장감이 오늘도 저를 감쌌어요. 한두 시간 그러고 나면 주제 하나 잡아 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는데, 오늘은 유달리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경향에 칼럼을 연재한 지 딱 1년 되는 때라 그런가요. 그러다 퍼뜩 형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요새 경제와 세상 돌아가는 걸 바라보는 후배의 푸념이라고 봐 주세요.
오늘 기사를 보니 진보성향 학자와 교수들 300여명이 과감한 경제개혁을 촉구하는 선언을 한다고 하네요. 재벌, 부동산, 노동 분야에서 개혁이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를 담겠다는 것입니다. 하긴 제가 참여하고 있는 재정개혁특위에서 종합부동산세 개혁방안을 권고했는데, 논의과정에서 이 정도 증세로 공평과세가 실현되겠는가, 부동산시장이 잡히겠는가, 이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정부는 이보다 더 낮은 수준의 세제개편안을 발표하는 바람에 위원들이 아쉬워했던 게 사실입니다. 시장에 내성을 더 키워준 꼴 아니냐는 거죠.
보통 ‘시국 선언문’은 정권과 이념적 대척점에 있는 지식인 진영에서 나오는 터라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시기적으로 이르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어요. 개혁정책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지 표명과 지지세력을 결집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벌써 지지층에 균열이 생겼다는 의구심을 자아낼 수도 있으니까요. 진보층 특유의 ‘이념적 충실성’ 혹은 ‘정치적 조급성’이 재현된 것 아닌가 하는 해석도 가능하겠고요. 제가 몇 년 전 정치학자와 수행한 연구에서 확인한 건데요, 보수정권에서는 당파성과 정치에 대한 신뢰가 높은 상관성을 가지는 반면, 진보정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진보층의 정치신뢰 수준은 그다지 ‘정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차하면 자기가 지지했던 정부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울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얼마 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진보진영의 개혁 조급증과 경직성 때문에 오히려 문재인 정부의 개혁이 실패할 수 있다”, “지지층의 비판을 각오하고 규제 혁신을 위한 정치적 결단을 고민하고 있다”는 발언을 했더군요.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재벌개혁론자이자 문재인 정권 경제정책의 한 축을 담당하는 그가 이런 발언을 허투루 했을 리 없습니다. ‘시민사회 시절이 좋았는데…’라고 되뇌며 김 위원장께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또 하나 있어요.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요새 정부의 에너지정책에 대해 말들이 많아요. 아시잖아요, 제가 여러 전문가, 기업인과 의기투합하여 ‘에너지전환포럼’이라는 사단법인 만든 거. 정부가 화석연료와 원자력 위주의 에너지체계로부터 에너지 절약과 효율 향상으로 수요를 줄이면서 재생에너지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고 해서 다들 큰 기대를 갖고 있었어요. 저로서는 대학원 시절부터 환경에너지 분야를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졸업 후 20여년이 지나 드디어 현실에서 평소 생각이 실현되는 기회를 얻은 셈이고요. 그런데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년, 에너지전환의 방향만 있을 뿐, 추진전략과 성과는 기대에 못 미친다는 답답함을 토로하는 분들이 많아요.
에너지전환이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님을 잘 알고 있어요. 화석연료를 100% 수입하는 나라에서 “값싼 에너지를 풍부하게 공급한다”는 대원칙을 40여년 동안 고수해 왔으니 세상이 금방 바뀔 리 없겠죠. 석탄화력과 원자력발전 분야 이해관계자의 조직적 반발이 엄청나답니다. 원자력공학과가 문을 닫아 기술과 인력 해외로 다 빠져나간다, 아름다운 우리 강산 보기 흉한 태양광시설로 뒤덮인다, 사실 왜곡과 과장이 섞인 자극적인 표현이 난무합니다. 제가 조사해 보니 원자력공학과 입학생들 여전히 많고요, 태양광과 풍력 입지가 부작용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기존 발전시설이 야기하는 미세먼지와 주민 고통을 생각하면 비할 수 없이 바람직한 방향이죠. 그분들과 끝장토론 한번 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세계 에너지시장이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바뀌고 있는데, 큰 흐름에 뒤처지면 시장과 일자리, 지속 가능한 미래까지 모두 잃을까 봐 걱정입니다.
에너지전환 추진을 위한 정부의 컨트롤타워와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아 시장이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에요. 전기요금만 해도 산업부 장관과 한전 사장의 말이 다르게 들려 기업들은 헷갈릴 겁니다. 영국이나 덴마크, 독일 등 재생에너지 정책을 제대로 하는 나라들은 예외 없이 효율적인 정책집행 구조를 구축했더라고요. 에너지전환에 대한 국민 여론이 우호적인 이때, 정부가 좀 더 지혜와 추진력을 발휘해 주면 좋겠어요.
R형, 다 쓰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조만간 꼭 뵐게요.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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