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1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곧 물러날 것으로 소문이 돌던 모 부처 1급 관리관에게 “고려대 나왔으니 그거 좀 어필하시라”고 말을 던진 적이 있다. MB정부는 고려대와 소망교회, 영남 출신 인사들을 장관직에 지명하면서 ‘고소영’ 내각으로 불렸다. 참여정부 임기가 끝나는 해에 승진한 그는 영남 출신인데다 내부 신망이 높던 관료이니 ‘욕심’을 내면 자리보전은 물론 잘하면 차관도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반응은 의외였다. “구질구질하게 그런 걸 왜 해”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관료의 ‘거의 대부분’은 출세주의자일 것이라는 공무원관(觀)에 균열이 생긴 것도 그때였다.
그렇다 해도 관료들에게 ‘자리’란 가장 중요한 목표가 아니던가. 고시를 패스하고 요직을 거친 뒤 장차관에 오르는 것이 그들의 성공 스토리로 통했다. 복지부동하다거나 책임 회피에 급급하다는 욕을 먹는 것도 어쩌면 좋은 자리에 오르려는 본능적 생존 방식일 수 있다. 막대한 예산을 주무르고 국책연구기관·대학에 정책 과제를 발주하고 검증된 결과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다보면 그들은 전문가가 된다. 국회·언론·이해당사자를 만나 정책의 취지를 설명하고 필요성을 설득하기를 직업적으로 반복한다. 국제적인 식견도 갖췄다. 그런 관료들이 구축한 논리는 웬만한 전문성으로 뚫기 어렵다.
이런 ‘늘공’(늘 공무원·전문 직업 관료)의 승진길이 최근 좁아졌다. 문재인 정부 초대 내각은 늘공보다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대세다. 실제 1기 경제팀에서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최종구 금융위원장 후보자만 직업 관료일 뿐 나머지는 정치인과 교수 출신이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과제인 재벌 개혁, 탈원전, 검찰 개혁, 교육 혁신 등은 교수 출신 ‘어공’에게 맡겨졌다.
늘공의 공명심(公明心)보다는 어공의 공명심(功名心)을 국정 운영의 동력으로 삼은 것이다. 늘공은 태생적으로 이상보다 실현가능성에 초점을 둔다. 법과 규정의 절차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혁신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비해 어공은 정권과 국정철학을 공유하고 명운을 같이하기 때문에 충성도도 높다.
어공의 중용은 각종 개혁과제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그러나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일방적인 밀어붙이기는 시민들에게 피로감을 준다. MB의 4대강 사업이 대표적이다. 한반도 대운하 건설이라는 대선 공약에서 변질된 4대강 사업을 그토록 일사불란하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충성심 경쟁’ 때문이었다.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은 “속도감 있는 추진”을 강조하며 ‘4대강 장관’임을 자처했다. 기획재정부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생략하기 위해 재해 예방사업을 예외조항으로 추가해줬고, 환경부는 최소 1년이 걸리는 환경영향평가를 4개월 만에 마무리했다. 미르재단 모금과 블랙리스트 작성에서 밝혀졌듯 박근혜 정부의 어공들은 대통령의 뜻이라면 불법과 탈법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국정은 농단됐고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다.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정부다.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고 있다. 문 대통령 역시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이 앞서가면 더 속도를 내고, 국민이 늦추면 소통하면서 설득하겠다”고 했다. 이제 어공들이 바뀔 차례다. 어공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이를 간파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취임식에서 “늘공인 여러분이 전문성·자율성에 근거해 내린 판단을 일관되게 실행할 수 있게 외풍을 막아주면서 조직과 직원을 보호하는 것이 어공인 저의 의무”라며 “적극적으로 판단하고 일관되게 실행해달라. 그 다음은 제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전문성과 현실적 실행능력이라면 늘공들도 혀를 내두르는 그가 공직 사회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이제 어공에게도 이상을 향한 사자의 용맹함뿐 아니라 전문성으로 현실을 움직이는 여우의 교활함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산업부 박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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