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 이래 계속 경기가 나쁘고, 특히 대통령께서 취임하신 이후 경기는 더욱 나빠지고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앞으로 2년 동안도 경제는 침체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투자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 가까운 수준으로 저조합니다. 기업들도 활력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대통령께서는 어떻게 진단을 하시기에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고 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어느 정부에 물은 질문일까? 문재인 정부가 아니다. 참여정부 경제정책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 방송 녹취록 하나를 발견했다. ‘KBS 특별방송 참여정부 2년6개월 노무현 대통령에게 듣는다’다. 읽어보다 흥미로운 점을 몇 개 발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론의 비관적인 경제인식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질문을 보자.
“저희 공장 부근에는 3000원짜리 밥을 팔고 있는 소위 ‘함바집’이 여러 군데 있는데, 최근에 문을 닫는 집이 늘고 문을 연 집마저도 손님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또한 일부 시민단체를 포함한 사회가 반기업적인 정서를 갖고 있어서 기업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투자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업들이 자부심을 느끼면서 투자하고 고용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당시 우리 경제는 어땠을까. 2005년 성장률은 3.9%, 소비 증가율은 4.4%, 설비투자 증가율은 4.8%였다. 참담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성적표다. 한국 경제는 이듬해 5.2%, 2007년엔 5.5% 성장했다. 소비 증가율도 각각 5.2%, 5.3% 상승했다. 설비투자 증가율은 2006년 8.4%, 2007년 9.7%로 큰 폭으로 늘었다. 결과적으로 침체를 예상했던 ‘많은 전문가’들은 틀렸다.
‘불황’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게 고등학생 때이던 1989년 말이었다. “새로운 1990년대를 앞두고 있지만 한국 경제를 생각하면 그리 희망차지만은 않다”는 TV 뉴스 앵커의 침울한 목소리는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지난 30년을 돌아보건대 한국 사회가 불황이 아니었던 때는 별로 없는 것 같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89년 5738달러에서 지난해 3만1370달러로 6배가량 늘어났다. 글로벌 기준으로 한국만큼 성장한 국가도 찾기 힘들다. 그런데도 국민들이 체감을 하지 못한다면 그건 성장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소득불평등이나 자산불평등 같은 분배에서 고장이 났을 수 있다.
실토하건대 한국 언론의 경제 보도가 외환위기 이후 더 시니컬해진 측면이 있다. 거시 지표가 좋으면 체감을 못한다고 하고, 그러다 거시 지표가 나빠지면 ‘큰일났다’는 식이다. 건강한 사람도 위, 간, 폐, 팔다리, 눈, 혈압 등 어딘가에는 문제가 있게 마련인데 완벽한 경제란 있을 수 없다. 다들 어떤 문제점을 안고도 고쳐가며 그런대로 살아가듯 국가경제도 그렇다. 독감 판정을 받느냐, 암 판정을 받느냐에 따라 환자의 생각과 행동은 달라진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과도하게 비관적인 진단은 경제주체의 심리를 얼어붙게 만들고, 정책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
올해 한국 경제가 어려운 것은 맞다. 그러나 경제위기 수준의 비관론을 펴는 것으로는 매 분기 역대 최다를 경신하는 해외 출국자 수와 대외순금융자산(거주자의 해외 보유 금융자산에서 외국인의 국내 투자 금융자산을 뺀 것) 증가를 설명하기 힘들다.
다시 녹취록으로 돌아가보자. 노 대통령은 뭐라고 답했을까. “대체로 우리 경제의 전망을 어둡게 보는 것은 매우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정치적으로 입장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저는 경제를 어둡게 얘기해서 우리 경제를 위험에 빠뜨렸던 사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경제를 어렵게, 어둡게 말하지 않는 절제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병률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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