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경제라는 것은 고유의 논리를 가지고 있어 자기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인데, 경제학자나 정치가들이 이런저런 말로 이름 붙여 부르면서 각자의 취향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 정치인의 이름에다 이코노믹스를 합성해 만든 ‘○○노믹스’의 시리즈를 볼 때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시리즈 중 기억에 남는 최초의 것은 레이거노믹스인데, 한때 한국의 경제학 교과서에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공급중시경제학이 그것이다. “세율을 인하하면 오히려 세수가 증가한다”는 직관에 어긋나는 주장이 그 핵심 내용 중 하나인데, 세월이 지난 뒤 레이건의 정치적 후계자 격인 부시 2세조차 “무당경제학(voodoo economics)”이라며 부정한 바 있다. 지난 정권 초기, 어느 경제 관련 토론회에 갔다가 바로 저 주장이 감세의 논리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을 보면서 그만 이성(?)을 잃고 흥분하는 바람에 제대로 토론도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바로 그 정권의 4대강 사업과 관련해서 누군가는 공급중시경제학과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정반대편에 서 있는 케인스 경제학을 끌어오기도 했다.
1981년 레이건 미 대통령, 레이거노믹스 발표 (출처 : 경향DB)
바로 그 케인스는 저서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의 마지막 부분에 미치광이 권력자들도 실은 옛날 어느 경제학자의 정신적 노예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케인스만 해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 아마도 경제사상의 위대함을 믿었던 듯한데, 현실은 그의 생각과는 반대인 듯도 하다. 권력자는 필요할 때면 논리적으로는 서로 모순되는 경제학자들의 생각조차도 마음대로 끌어다 쓰고 버리기를 되풀이할 뿐이니 노예가 된 것은 정치가가 아니라 경제학자가 아닐까?
소득주도성장론은 이미 지난 대선 국면에서부터 진보적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어 왔던 것이고, 외국에서는 훨씬 오래전부터 이론적·경험적 연구가 진행된 주제이기도 하다. 원래는 이윤주도성장에 대립되는 의미에서 임금주도성장이라는 개념이 사용된다. 임금은 한편에서는 기업의 생산비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소득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올라가면 기업의 생산비 상승으로 투자를 줄이는 효과도 있지만,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늘어나 소비수요가 증가하는 효과도 있다. 만약 뒤의 효과가 앞의 효과보다 크다면 임금인상은 오히려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이고, 이를 임금주도성장이라 부른다. 소득분배가 불평등해졌다는 현실, 자본이 더 많이 가져가도 투자는 잘 안 한다는 현실(사실 ‘좌파’ 정권 때문에 투자의욕을 잃는다고 외쳐대던 이들이 누가 봐도 늠름한 ‘우파’ 정권 밑에서 이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아직 들은 바 없다!) 등이 한국에서도 임금주도성장의 정치적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임금주도 대신에 소득주도라는 말을 쓴 것은 아무래도 자영업의 비중이 높은 한국의 현실을 감안한 것일 텐데, 보수적 정치가들은 예의 ‘실용주의’를 발휘해 이를 자기 것으로 갖다 쓴다. 사실 소득이라는 말 자체는 무색무취한 것이어서 소득주도성장을 말할 때 왜 노동소득과 자영업자의 소득만 얘기해야 하고 이를테면 배당소득이나 재산소득은 얘기하면 안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명확하게 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배당소득 분리과세를 마치 소득주도성장인 듯한 뉘앙스로 포장하는 일이 벌어진다. 결국 소득주도라는 말은 당사자에게도 대중에게도 잊힌 립서비스로 전락하고, 결국 가장 큰 혜택은 배당만 몇십억원씩 받는 재벌 총수들에게 돌아갈지도 모른다.
일본의 진보적인 경제학자, 심지어는 마르크스 경제학자 중에도 아베노믹스를 지지하는 이가 있다고 한다. 경제정책에 이데올로기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얘기하면서 온갖 좋은 말만 내걸고 결국 잇속은 가진 자들이 챙긴 것은 불과 얼마 전의 경제민주화 공약(차라리 푸닥거리라 불러야 옳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성장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소득분배의 평등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중요한 가치임을 강력히 제기함으로써 대중을 설득할 때 비로소 이런 헛소동의 악순환을 깰 수 있을 것이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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