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삼성), 정몽구(현대차), 최태원(SK), 구본무(LG) 등 재벌 총수 9명이 어제 국회 청문회장에 섰다. 총수들이 한꺼번에 불려 나온 것은 1988년 5공비리 청문회 이후 28년 만이다. 대내외 경제가 최악인 상황에서 총수들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연루돼 청문회장에 나온 것은 본인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시민들이 청문회를 주시한 것은 국정농단 의혹을 소상히 밝히고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정경유착을 단절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의 이런 기대는 몇 시간 만에 여지없이 배신당했다. 의원들은 이미 알려진 내용을 묻고, 총수들은 알맹이 없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공허한 질문에, 공허한 답변이었다. 총수들은 동문서답·모르쇠·변명으로 핵심을 피해갔다.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에 대해 “청와대의 출연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허창수 전경련 회장)며 강제성은 시인했지만 사업 특혜나 총수 사면 등 대가성 의혹은 부인했다. “사회공헌이든 출연이든 어떤 부분도 대가를 바라고 하는 지원은 없다”(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할당받은 만큼 냈다. 대가성이라는 생각을 갖고 출연한 적이 없다”(최태원 SK 회장), “면세점 추가 입찰이나 수사 관련 로비와는 관계없다”(신동빈 롯데 회장)고 주장했다.
국회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6일 실시한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대기업 총수들이 ‘전경련 해체에 반대하는 분은 손을 들어달라’는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의 질문에 손을 들어 의사 표시를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총수들의 이런 답변은 국회에 사전 제출한 자료와도 거리가 있다. 총수들은 지난해 7월과 올해 2월 박근혜 대통령과의 독대 때 “글로벌비즈니스센터 조기 착공 협조”(현대차), “아울렛 의무휴업 확대 우려”(롯데) 등 민원을 요청한 것이 확인된 터다. 이러고도 대가성이 없었다는 것은 뻔뻔한 얘기다.
이재용 부회장은 재단 출연 외에 정유라의 승마 지원에 별도로 100여억원을 지원한 것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통한 지배구조 개편의 대가라는 의혹에 대해 “지원은 실무자들이 결정한 것. 합병은 승계와 관계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는 “합병은 승계의 디딤돌”(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 “합병에 찬성해달라는 압력이 있었다”(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는 증언과도 배치된다. 이 부회장은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모르겠다’로 일관했다. 반복된 모르쇠에 “기억력이 좋고 아는 게 많은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넘겨야 하지 않나”라고 되묻자 “언제든지 훌륭한 분 있으면 경영권을 넘기겠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총수들의 이런 태도는 건강한 재계 생태계 구축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재계는 총수를 청문회장에 불러내는 것 자체가 기업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행위라고 말하지만 무성의한 답변이 되레 기업의 신뢰를 갉아먹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재용 부회장, 최태원 회장 등이 전경련 탈퇴 의사를 밝히면서 모금창구인 전경련 해체를 시사했지만 유착의 근절 방안은 내놓지 않았다.
민심의 분노는 국정농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시민들은 이 과정에서 재확인된 특권 세습, 불평등, 부정 부패,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재벌이 있다. 5공비리 청문회 때 재벌 총수들은 정경유착의 단절을 선언하고 대국민 사과 성명까지 냈지만 뒷거래는 계속됐다. 2002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불법 정치자금 820억원을 트럭째 받은 차떼기 사건은 기억에도 새롭다. 2004년 정치자금법이 개정된 이후에도 기부금 명목으로 모금행위는 단절되지 않고 있다.
시민들이 특히 삼성에 의구심을 갖는 것은 총수 일가를 위해 국민연금이 시민 자산에 손실까지 입혀가며 지원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밑바닥에는 20년 전 아버지로부터 증여받은 60억원을 종잣돈으로 주식 편법 운용 등을 통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8조원대의 부를 움켜쥔 금수저의 수법에 대한 좌절감이 깔려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총수 중심의 황제적 경영관행에서 기인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재단 출연금 역시 이사회 의결도 거치지 않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따지고 보면 권력에 대한 기부금의 최종 수혜자는 재벌총수와 권력에 기댄 비선 실세이다. 지금 시민이 기대하는 것은 평등하게 권리를 갖고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다. 시민들은 결코 재벌을 권력에 자릿세 뜯긴 노점상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인식을 깰지는 재벌의 의지에 달려있다. 회피할 경우 촛불은 재벌을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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