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5일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한 환태평양 FTA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공청회가 열렸다. 하지만 시작부터 어디서 많이 보던 광경이 연출되었다. 회의장 옆방을 입추의 여지 없이 가득 채운 경찰들, 그리고 회의장 뒷좌석의 용역들, 모두 힘을 모아 소리치는 농민들을 밖으로 내몬다. 2006년 2월 한·미 FTA 공청회의 ‘데자뷰’! 이해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공청회의 연단에는 막상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 환경단체 등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공청회의 프레임도 찬반이 아닌, 찬성 중 ‘지금 하자’와 ‘좀 있다 하자’로 짜여 있다.
‘신중론’으로 포장된, 실은 찬성론의 한 변종이라 할 ‘좀 있다 하자’론은 그 근거로 이런 것을 들고 있다. 첫째, 실익이 미미하며, 둘째, 한·일 FTA가 TPP의 핵심이라고 할 때 제조업 피해가 상당하며, 셋째, 중국을 자극해 한·중 FTA에 부담이 된다. ‘지금 하자’론에 비해 ‘좀 있다 하자’론이 그나마 좀 더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 미야기현 농부들이 환태평양경제협정(TPP) 반대 집회에 참가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처: AP연합)
하지만 이나 저나 TPP의 위험성에 귀를 막고 있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다른 무엇보다 며칠 전 폭로된 TPP 지적재산권 챕터는 통상조약이 어떻게 국내 민주적 절차를 우회해서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극단적으로 대변하는지, 또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어떻게 공동화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알려진 바, 지재권 챕터의 감시 및 집행 규정 등은 미국, 한국 등이 서명했지만 유럽의회가 거부함으로써 무산된 ‘위조품 거래방지협정’(ACTA)’이나 ‘온라인 저작권 침해금지 법’(SOPA) 등에서 다시 긁어 모은 것이다. 만일 미 의회가 새로운 패스트트랙 법안을 입법해 수정없는 찬반만을 물어 TPP가 통과된다면, 이는 입법부를 우회하더라도 얼마든지 초국적 기업의 이익이 관철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 TPP는 밀실에서 극비리에 추진되어 왔고, 미 의회조차도 사실상 배제한 채 오직 600여명의 미기업 자문역만이 협정문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안작업에 참여한 미무역대표부 산하 지재권부문 산업통상자문위(ITAC) 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왜 극비리에 협상이 추진되었는지 이해될 만 하다. 이들 비밀취급인가를 받은 16명의 위원은 GE, 존슨앤존슨, 시스코, AT&T, 영화 음반 등 엔터테인먼트, 생명공학, 제약업계 등 이익의 대변자로 구성되고 단 한명의 공익대변자도 없다. TPP는 그러므로 할리우드, 미 초국적 제약업계, 미 IT업계를 위한 극단적 보호주의의 다른 이름으로 자유무역과는 애당초 무관한 것이다.
더불어 작년에 유출되었던 투자챕터를 분석해 보면 TPP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진다. 핵심은 역시나 저 끝없는 논란거리인 투자자-정부 소송제(ISD)라 하겠다. ISD는 TPP 제12장 2절에 배치되어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첫째, 호주만은 ISD 수용을 거부했다는 점과 둘째, 무분별한 자본이동을 규제하기 위해 칠레가 중앙은행 외환의무예치제(URR) 권한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혹 우리가 TPP에 가입하더라도 호주정부를 상대로 ISD소송을 제기할 수 없으며, 칠레에 투자할 때는 투자액의 상당분을 칠레중앙은행에 무이자로 예치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TPP로 인해 아·태지역국가 공공정책의 무력화 위험이 현저히 증대될 것이라는 점이다.
TPP는 그 자체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이기 때문에 농업을 포함해 개별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사실상의 새로운 변수는 일본이기 때문에, 한·중 FTA로 인해 중하위 중소기업 대부분이 영향권에 포함된다면 TPP로 인해 자동차를 포함한 대기업도 상당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미 FTA가 TPP의 한 원형이라고 볼 때, TPP는 곧 한·미 FTA가 환태평양 전역에 확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TPP 가입은 결국 쌀개방과 제조업 주력의 피해를 포함시켜, 한·미 FTA를 한 번 더 체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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