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추경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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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제칼럼

[아침을 열며]추경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방정식

by eKHonomy 2019. 4. 15.

198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카터 대통령이 레이건에게 진 데는 경제 문제의 영향도 컸다. 당시 미국은 9%대의 높은 인플레이션율과 7%에 달하는 실업률로 이른바 ‘경제고통지수(물가상승률+실업률)’가 사상 최악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 미국 역사상 가장 도덕적인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카터의 지지율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24%까지 떨어졌다. 물론 카터 행정부의 경제정책 탓만으로 발생한 상황은 아니다. 결정적 요인은 1979년의 제2차 오일쇼크다. 세계 원유 공급의 15%를 점하던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일어나면서 원유 수출이 전면 중단됐다. 유가를 비롯한 물가가 폭등하고, 실업은 급증하는 등 미국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카터로서는 억울한 일이지만 결과가 말을 할 뿐. 경제가 정치권력을 바꿀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됐다.


미국뿐이겠는가. 김영삼 정부 때 닥친 외환위기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불러왔다. 기업가 출신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로 손쉽게 대선에서 이겼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군사정권의 연장선인 노태우 정부가 탄생한 것은 야권의 분열, 여권의 관권선거 등 요인뿐만 아니라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황’에 힘입은 경제적 약진도 적지 않은 몫을 했을 것이다. 카터와는 반대로 경제의 덕을 본 셈이다.


정부가 조만간 국회에 제출할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놓고 정치권이 시끌벅적한 것도 이런 경제와 권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교훈 때문이다. 정부가 미세먼지와 강원도 산불, 포항지진 대책에 경제 여건 악화 대응과 민생지원까지 곁들인 추경안을 마련키로 하자 여야의 반응이 극단으로 갈린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반드시 필요한 추경이라며 조속한 편성을 주장한다. 반면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재난추경’과 ‘비재난추경’을 분리하자면서 경기부양 사업은 ‘1원’도 포함돼선 안된다는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추경이 필요한지를 따져본 뒤 추경을 할 재정여력은 어떤지를 보는 것이 순서다. 최근 미국과 중국에 이어 유럽까지 세계 경제의 둔화세가 뚜렷해지면서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는 타격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기업들은 불투명한 경기 전망으로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지 않고 있고, 부채에 시달리는 가계도 소비에 나설 여력이 없다. 그나마 정부라도 곳간을 풀어 경제를 살리는 마중물을 대야 한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반면 추경을 통해 당장의 경제성장률은 다소나마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경기 활성화와 경제 체질 개선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다.


재정여력 측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2017년 기준으로 국가채무에 공공기관 채무를 합한 일반정부 채무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한국은 42.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10.9%)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한국의 재정건전성은 매우 양호하다고 볼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조차 한국의 재정여력을 감안해 GDP 대비 0.5%(약 9조원대)의 추경 편성을 권고하고 있는 마당이다. 그러나 당장은 재정건전성이 좋아 보여도 경기 둔화로 올해 이후 세수는 불안하다. 무엇보다 급격하게 진행되는 고령화를 감안할 때 자칫 방만한 확대재정정책을 실시하다간 국가채무가 단시간에 급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 국가채무를 늘려가며 지금의 경기를 살리면 미래 세대에게 빚을 떠넘기는 것이라는 주장과 지금 경제가 살아나면 궁극적으로 미래 세대의 삶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맞선다. 국가와 경제 운영에 대한 현실 인식과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불일치다. 양쪽 모두가 나름의 논리를 바탕으로 충분히 합리적인 토론이 가능한 주제다.


그런데 이런 쟁점이 정치로 넘어오면 오염이 되고 만다. 여당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추경을 통해 경제를 살리거나, 최소한 살아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을 것이다. 반면 (정권을 빼앗아오기 위해)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정부 경제정책이 잘못됐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싶은 야당은 추경을 통해 경제가 단기적으로라도 호전되거나 호전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저지하고 싶을 것이다. 추경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의가 진흙탕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눈앞의 표심만 좇는 이런 싸움에 추경 여부가 국민들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한 고려가 얼마나 되고 있을까. 이런 싸움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볼 수 있을까. 경제는 정치권력을 바꾸지만 끝내는 정치에 종속되고 마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김준기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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