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한가운데 외딴 섬인 이스터섬은 모아이라 불리는 거대 석상으로 유명하다. 부활절인 1722년 4월5일 네덜란드의 탐험가 야코프 로헤벤이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섬에 도착했을 때 나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시들어 말라버린 풀밖에 없는 척박한 불모의 땅이었다. 섬의 원주민들은 서로 전쟁을 벌였고, 식량이 부족해 인육을 먹기까지 했다. 원래 이 섬은 원시림이 무성했고, 온갖 나무열매와 육지·바닷새, 물고기, 돌고래, 조개 등의 먹을거리가 넘쳐났었다. <총·균·쇠>로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UCLA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또 다른 대작인 <문명의 붕괴>에서 아열대의 파라다이스였던 이 섬이 어쩌다가 황무지가 됐는지 상세히 서술했다.
다이아몬드 교수가 분석한 이스터섬 붕괴의 단초는 인간에 의한 삼림파괴다. 원주민들은 무성했던 나무들을 난방과 취사는 물론 화장용 땔감으로 쓰기 위해 마구 베어냈다. 큰 나무들은 카누를 만들기 위해 잘려나갔고, 석상을 운반하고 세우는 데 필요한 목재와 밧줄의 재료로도 쓰였다. 무엇보다 평지에 있는 대부분의 숲이 밭으로 개간되면서 나무의 씨가 말랐다. 이런 남벌이 수세기 동안 진행되면서 이스터섬의 삼림은 사라졌고, 이는 섬사람들의 삶에 치명타가 됐다. 주요 식량원이던 야생 조류와 열매가 크게 줄었고, 돌고래를 사냥하기 위해 먼 바다에 나갈 카누도 만들 수 없었다. 삼림파괴로 토양 침식이 일어나고 흙이 건조해지면서 곡물 생산도 급감했다. 결국 이스터섬 사회는 기아와 전쟁이 이어지며 붕괴에 이르게 됐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태평양에 고립돼 있던 이스터섬은 우주에 고립돼 있는 지구와 비슷하다며 환경파괴로 인해 지구의 미래에 닥칠 최악의 시나리오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이아몬드 교수가 이 책을 낸 것은 15년 전인데, 그의 경고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 이념이 된 지 오래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몰렸던 글로벌 대기업들까지 환경보존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제로로 만들겠다는 ‘탄소중립’ 선언을 했다. 이달 초에는 국내 재계 3위인 SK그룹의 8개 계열사가 사용전력 100%를 2050년까지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로 전환한다는 ‘RE100’ 캠페인에 국내 기업으론 처음으로 가입 신청을 했다. RE100에는 구글과 애플, GM, 소니, 이케아 등 260여개 글로벌 대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요즘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당연시되고 있지만 그래도 기업은 자선기관이 아니라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제 주체다. SK 계열사들이 RE100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는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는 신재생에너지의 가격이 화석연료보다 비쌀뿐더러 신재생에너지로 기업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는 막대한 투자도 필요하다. 기업의 비용이 커지면 생산하는 제품은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SK가 결단을 내린 데는 환경 등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는 최태원 그룹 회장의 강한 의지가 작용했을 것이다. SK 계열사 경영진은 최 회장에게 보고하는 사업계획에 ‘슬기로운’ 탄소중립 방안을 담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이는 그룹 총수의 개인적 관심사로 좌지우지될 문제가 아니다. SK의 시도는 이제 다른 기업들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길이 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탄소배출이 많은 나라에서 생산한 제품에 수입관세를 붙이는 ‘탄소국경세’ 도입을 검토하는 등 세계 곳곳에서 환경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기업의 친환경 경영은 필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를 살리는 친환경 경영이 확산되기 위해서는 SK 같은 기업들이 손해 보고 장사하지 않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친환경 경영에 대한 ‘인센티브’가 필요한 건데, 이는 소비자들의 몫이다. 소비자들이 환경파괴 기업의 제품을 거부하고 친환경 기업의 제품을 사야 한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확산되고 있다. 글로벌 식품기업 네슬레는 지난해 세계 곡물시장의 큰손인 카길로부터 브라질산 대두의 구입을 중단했다. 카길의 브라질산 대두가 삼림 벌채로 개간된 땅에서 생산되고 있어서다. 미국 최대의 건축 자재, 공구 유통업체인 홈디포는 지속 가능한 벌채가 이뤄지는 숲에서 나오는 목재만 구매하고 있다. 네슬레나 홈디포의 결정 모두 소비자들의 압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기업이 바뀌려면 소비자들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김준기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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