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칼럼]복지 논쟁 제대로 해야 한다
본문 바로가기
=====지난 칼럼=====/장하준 칼럼

[장하준칼럼]복지 논쟁 제대로 해야 한다

by eKHonomy 2012. 1. 2.

올해는 20년 만에 총선과 대통령 선거가 겹쳐서 우리나라 정치 구도가 크게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축은 복지 문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까지 우리나라에서 복지국가라는 것은 몽상가들이나 하는 이야기로 치부되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지국가는 ‘복지병’을 일으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잘못된 제도라고 믿어왔고, 심정적으로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광범한 복지는 유럽의 잘사는 나라들만 할 수 있는 꿈같은 것으로 여겨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작년에 무상급식이라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었던’ 오세훈 시장이 서울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물러나고, 오 시장의 이념적 후계자를 자처한 나경원 의원도 보궐선거에서 패함으로써 복지는 이제 우리 정치 아젠다에서 핵심적인 이슈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감세와 복지 억제를 추진해 온 한나라당마저 복지 확대를 핵심 공약으로 삼는 박근혜 의원이 장악하면서 우리 정치 논쟁의 지각이 급변하고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고용복지 정책 세미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DB

그러면 복지가 왜 이렇게 갑자기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가? 한마디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난 15년여 동안 추진된 시장주의 노선에 대해 국민들이 회의를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추진되었지만 외환위기 직후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장자유화 정책들은 초기에는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소위 우파들은 1997년 금융위기가 우리가 진작 추진했어야 할 국가주도 경제체제의 폐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위장된 축복’이라며 시장자유화에 열을 올렸고, 소위 개혁파들도 시장자유화를 과거 ‘관치’와 재벌지배로 왜곡된 우리경제를 바로잡는 수단으로 보아 그를 지지하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시장주의적 개혁 결과 경제성장이 저하되고 불평등이 상승하며, 고용 안정성이 떨어지자 국민들은 불안과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의 원인이 시장주의 개혁이라는 것이 잘 인지되지 않았다.

많은 수의 국민들이 빈부격차가 늘어나는 것은 시장 경쟁의 강화 때문에 실패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모든 국민이 시장경쟁력을 높여 실패하지 않는 것이라는 시장주의자들의 설명에 동조하였다. 이에 따라 한동안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인사말로 쓰였고 어른들은 ‘재테크’, 젊은이들은 ‘스펙 쌓기’에 몰두하였다.

소위 개혁파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이런 흐름에 동조했다. 다만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시장논리가 제대로 관철되기 위해서는 정부 관료와 재벌, 그리고 일부 대기업 노조 등 힘이 있는 자들이 시장질서를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규제가 없어져야 관료의 힘이 약해지고, 주식시장이 더 자유화되어 주주권이 강화되어야 재벌이 더 잘 통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는 대기업 노조들의 이기주의가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 노동자를 해친다며, 이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동시장 규제를 더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집권 기간에 우리 경제의 상황이나 대부분 국민들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국민들은 그에 따른 불만을 이명박 정부를 선출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특히 노무현 정부가 집권 후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동북아 금융허브 등 시장주의적 정책들을 더 강력하게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그나마 있었던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이 없어졌고,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기왕 시장주의를 하려면 골수 시장주의 한나라당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집권 후 시장개혁이 더 강하게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은 회복되지 않는 가운데에서 불평등과 고용불안은 심화되었고, 국민들은 마침내 시장자유화 자체가 문제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일어난 2008년 국제 금융위기는 그동안 우리가 가져왔던 시장주의에 대한 환상을 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08년 위기 이후 지난 15년여 동안 우리가 전범으로 여겨왔던 미국과 영국의 경제가 극심한 위기에 빠지면서, 도대체 왜 시장주의 개혁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해 2008년 위기를 통해 아일랜드, 아이슬랜드, 두바이 등 노무현 정부가 시작하고 이명박 정부가 세게 밀었던 ‘금융 허브’론의 모범생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면서 금융 중심으로 우리 경제를 재편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금융시장을 더 개방하고 자유화하여 외국 금융자본을 더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 국민들은 복지정책의 강화가 증가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고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정책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복지 논쟁은 이제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논쟁의 핵심이 되었다.

물론 우리의 복지 논쟁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복지는 부자에게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우리나라나 미국과 같이 가난한 사람만 골라 도와주는 선택적 복지 제도를 채택한 나라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과 같이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이 혜택을 받는 보편적 복지를 채택하는 나라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를 채택하는 나라에서도 돈 많은 사람이 세금을 더 내게 되는 누진세가 있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복지 혜택을 받을 일이 더 많으니(예를 들어 저소득자들은 실업이 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으므로 고소득자들보다 실업보험을 쓰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복지제도는 부자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재분배하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는 소득 재분배 제도로 보는 것보다는 교육, 육아, 질병, 노령, 실업, 산업재해 등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어려움에 대비하는 사회보험을 전 국민이 ‘공동 구매’하여 그 가격을 낮추는 제도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또 하나 흔히 가지고 있는 복지에 대한 오해는 그것이 ‘성장’을 희생하고 ‘분배’에 치중하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복지지출을 통해 최빈곤층이 굶어죽지만 않도록 해주는 것을 기본 개념으로 하는 선별적 복지 제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국민소득 대비 복지지출이 미국의 2배가 넘는 스웨덴, 핀란드 등이 미국보다 경제성장률이 더 높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제대로 된 보편적 복지국가는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

특히 지금 우리나라는 더 이상 복지국가 없이는 효율적인 경제발전을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1970~1980년대 같이 경제발전 수준이 낮을 때에는 많은 직업이 큰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대부분 4~5주만 재교육을 받으면 직업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경제는 (지식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고도의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런 경제에서는 기술 습득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직업을 한 번 바꾸려면 1~2년씩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할 자금이 없기 때문에 한 번 직장을 잃으면 이전과 같은 수준의 일자리를 찾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이런 경제에서는 직장을 한 번 잃으면 급격한 계층 하강을 하게 될 확률이 높으니,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노동자 개인으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일지 모르지만 기업이 단기수익을 추구하는 금융자본의 이익을 위한 ‘악성’ 구조조정뿐 아니라 장기적 생산성 향상에 필요한 ‘양성’ 구조조정까지 못하게 되면 국민경제 발전에 해가 된다.

이러한 상황은 젊은이들을 보수적으로 만들어 장기적인 경제 활력을 저해한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이 다들 의사, 변호사, 공무원 등 고용이 안정된 직장만 찾는 것은 외환위기 이후 중간경영자나 고급기술자들마저 정리해고되어 완전히 경제의 주류에서 도태되든지, 기껏해야 치킨집 등 영세 자영업을 통한 자기착취로 생존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복지제도 문제는 (물론 그것들도 중요하지만) 단순히 ‘공생’과 사회갈등 관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경제의 미래의 활력이 달려 있는 문제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