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칼럼] 부자들의 기부만으론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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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칼럼] 부자들의 기부만으론 부족하다

by eKHonomy 2011. 9. 6.
장하준 |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는 “우리가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 말은 지난 30여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시장주의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전제 - 즉,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라는 전제 - 를 잘 요약해 준다. 개인들이 본성대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다보면, 시장 기제라는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조화가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사회 전체가 이익을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세계 여러나라에서 일부 부자들이 나서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매기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유명한 금융투자가 워런 버핏이 이끄는 일군의 갑부들이 더 이상 부자감세 정책은 안 된다며 경제 위기 속에서 ‘고통 분담’을 위해 최상층 부자들(mega-rich)에 대한 세금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왔다. 특히 버핏은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자신의 실질 소득세율은 18% 정도로 자기 직원들보다도 낮다며 미국 의회가 최상층 부자들을 마치 무슨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호해 왔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최고의 여자 부자인 로레알 그룹의 최대주주 릴리안 베탕쿠르 등 16명의 갑부들이 공개서한을 통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1년에 50만유로 이상 돈을 버는 고소득자들이 한시적으로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부자 증세’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과 같은 초갑부들은 아니지만, 독일에서도 ‘부유세를 지지하는 부자들의 모임’이라는 단체가 결성돼 50만유로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분간 재산세를 더 물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세금뿐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는 재산의 99%를 기부하기로 약속했고, 워런 버핏도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이 사재 5000억원을 기부하였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정몽준 의원의 사재 2000억원을 비롯하여 소위 범현대가가 5000억원을 기부하고 나섰다. 이런 속에서 기부가 사회적으로 주요 이슈가 되면서 기부금에 매겨지는 증여세를 없애서 기부를 장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고, 일부 국회의원들은 100억원대 기부를 하고도 전셋집에 사는 가수 김장훈씨의 이름을 따서 기부를 많이 한 사람이 노후에 생계가 어려워지면 나라에서 지원해주자는, 소위 ‘김장훈법’을 발의하기까지 했다.


경향신문DB



기부행위는 칭찬받아야 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대가 없이 돈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따라서 이런 어려운 결정을 한 사람들, 특히 자신의 안위를 해쳐가면서까지 기부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존경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기부가 사회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조세, 그리고 적절한 규제와 삼위일체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버핏처럼 부자들이 기부도 더 하고 세금도 더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부를 강조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기부를 세금에 대한 대체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논리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시장주의적 사고에 따른 것으로, 정부가 강제로 돈을 빼앗아가는 세금보다는 돈 있는 사람이 자진해서 돈을 내는 기부가 개인의 자유를 덜 침해하면서 부를 더 넓게 나누는, 더 바람직한 길이라는 것이다. 부자들이 더 기부를 많이 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부자 감세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이다.

그러나 기부가 세금을 대체할 수는 없다. 첫째, 자기 재산의 99%를 기부한 빌 게이츠나 85%를 기부한 워런 버핏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돈이 있어도 기부를 하지 않는다. 기부가 훌륭한 행위라고 칭송받는 것이 바로 대부분의 사람이 기부를 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기부를 많이 한다고 하는 미국에서도 1년 기부액이 국민총생산의 2%가 채 안되는데, 이에 의존해서 정부 재정을 운용할 수는 없다. 자신의 재산을 거의 전부 기부한 버핏이 자신을 비롯한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도록 법을 바꾸자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둘째, 기부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지정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관례인데, 이는 기부할 수 있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 정하는 대로 돈이 쓰여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핏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여러가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해야 하는 민주사회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기부하는 사람들은 주로 빈곤층 아동의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아 그런 쪽에 기부를 많이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연히 노인 문제, 여성 취업 문제, 이주 노동자 문제 등 다른 중요한 문제들이 상대적으로 경시될 수밖에 없다. 물론 정부예산 중에서 기부가 많이 되는 쪽에 쓰이는 부분을 전용하여 상대적으로 기부가 적은 쪽에 쓸 수 있지만, 경직적인 정부 예산의 성질상,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기부의 액수와 지정 용도에 따라 예산 구성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셋째, 같은 액수의 돈을 내더라도, 세금이 아닌 기부로 내게 되면, 개인이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는 전적으로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것이라는, 시장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게 된다. 세금을 내는 것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개인이라도 사회의 덕을 보아 성공했고, 따라서 자신이 번 돈의 일정 부분을 사회에 돌려 줄 의무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기부를 하는 것은, 성공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잘나고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한 것이므로 자기 소득의 일부를 사회에 돌려줄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좋은 마음에서 되돌려 주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니,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아도, 완전히 다른 접근 방법이다. ‘성공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린 것’이라는 사고가 퍼지게 되면, 개인들이 자신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을 하는 것이 ‘선택 사항’이 되면서 결국 기부 문화의 기반마저 좀 먹게 될 수 있다. 


경향신문DB



적절한 세제와 더불어 제대로 된 기부 문화의 확립에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은 이윤 추구 활동에 대한 적절한 규제이다. 시장주의자들은 흔히 기업들이 괜히 어쭙지 않게 ‘사회적 책임’을 지려 하는 것보다, 냉혹하게 이윤을 극대화하고 그를 통해 국민소득을 최대화하는 것이 기업이 진정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기업가가 그래도 다른 사람을 더 직접적으로 도와주고 싶으면, 극대화한 이윤에서 일부를 헐어 기부를 하면 되니까, 기부를 많이 하기 위해서도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윤 극대화 과정에서 기업이 사회적인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해 문제가 대표적인 예이지만, 작업장의 안전 경시, 중소기업 착취, 소비자 권익 침해 등, 제대로 규제를 안할 경우에 기업의 이윤 추구에는 도움이 되지만,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복지를 해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마약 거래상이 마약을 더 많이 팔아 번 돈으로 기부를 더 많이 한다면 그것이 사회적으로 좋은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기부를 강조하는 시장주의자들은 대개 규제완화를 주장하는데, 규제를 완화하여 돈을 많이 번 기업주가 기부를 더 많이 한다고 해도, 만일 그 규제 완화 때문에 다른 사회적 문제가 생긴다면, 기부를 더 하는 것이 사회에 진정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기부는 아름다운 일이고 사회적으로 장려돼야 한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의 시장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최대한 규제완화를 하고 감세를 하여 기업들이 돈을 많이 벌게 하고, 그 다음에 기부를 많이 하도록 장려해 복잡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기부가 세금과 규제와 삼위일체를 이룰 때만이 진정으로 ‘함께 사는’ 사회가 건설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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