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에서 지나친 비관론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될 수 있다. 경제주체들이 실제보다 경제를 안 좋게 볼 경우 경제가 예상보다 안 좋게 굴러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사회 전체적으로 ‘조심성 있는 낙관론’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있다. 물론 과도한 비관론이 경계 대상이긴 하나 한국 경제를 둘러싼 위기론에는 정치권과 정부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고언이 꽤 있다. 예컨대 성장잠재력 확충과 경제주체들의 역동성 회복이 대표적이다.
2.5~2.6% 수준인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을 높이려면 중국의 거센 추격을 뿌리칠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한국 주력산업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호황을 누렸지만 중국은 이제 한국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를 빼면 사실상 한국이 중국에 기술적 우위를 자신할 수 있는 분야는 없다. 중국의 제조업 혁신은 IT산업이 주도하고 있으며 IT산업은 국내 제조업의 30%가량을 차지한다. 원천기술 확보, 핵심부품·소재의 해외 의존도 탈피, 4차 혁명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인적자본, 강소기업 육성 등도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을 위해 필요한 리스트에 올라 있다.
기업가들의 야성적 충동은 갈수록 시들해지고 있으며 경제주체들의 의욕 저하가 뚜렷하다. 한 기업 관계자는 “기술 발전은 정부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인데 규제는 여전하고, 먹거리를 찾지 못하다보니 현금만 쌓아두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입만 열면 규제완화를 외쳐도 기업들, 특히 대기업들은 정부가 자신들의 고충을 몰라준다며 하소연하고 있다.
“목표는 다 같이 행복하게 잘사는 거죠. 자살 덜 하고, 서로 반목하지 않고, 직장 안정되고, 복지제도도 잘돼 있어 잘리면 어쩌나 걱정 안 해도 되는…. 그런 의미에서 경제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올해 초 경향신문에 연재된 세계지성과의 대화 코너에서 이같이 말했다. 경제는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구제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줄임말이다. 경세제민의 관점에서 본다면 제대로 된 분배는 공동체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다.
성장잠재력 확충에 국가적 지혜를 모아야 하지만 성장에서 소외돼온 취약계층을 보듬는 사회안전망 구축 역시 특정 정권의 과제일 수 없다. 대다수 국민들이 평안한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성장과 분배의 적절한 조합을 두고 치열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주52시간제 등 한국 사회의 기본틀을 바꾸기 위한 지난한 작업이 진행 중이지만 진척은 더디기만 하다. 513조원에 이르는 내년 예산의 재원 배분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국회가 심의를 준비해야 할 때지만 여야는 ‘조국 전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기업과 국민을 피곤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여당은 집권 3년차 증후군에 빠지지 않으려는 듯 조국 사수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점진적 개혁을 위해 진지를 구축하고, 동조 세력을 확산시켜야 할 정부는 여전히 기업들의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다. 국민은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경제적 관점에서 정권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이대로 끌려가면 문재인 정부는 경제에 실패한 정부란 낙인을 감수해야 할 상황에 직면할지 모른다. 개혁의 도그마에 갇혀 성장동력을 확충하지 못한다면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줘야 서민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질 것이다. 참여정부 5년 평균 성장률이 4.3%였음에도 2007년 대선에서 경제대통령을 내세운 이명박 후보가 당선됐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자유한국당이 엊그제 MB노믹스를 방불케 하는 성장 중심의 ‘민부론’을 들고나온 것도 정부·여당의 무능이 작용한 결과다.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에 반대만 하는 보수야당은 콘텐츠가 부족하다. 제1야당 대표는 “심각한 천민사회주의가 대한민국을 중독시키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9년 한국 경제를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용기가 놀랍다. 민부론은 경총 등 일부 재계의 요구를 무분별하게 수용한 흔적이 강하다. 예컨대 기업이 법인세율을 보고 투자를 결정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지만 한국당은 법인세율 인하를 또다시 들고나왔다. 비록 단기간 기업들에 고통이 될지라도 장기적으로 경제체질을 강화하고 상생을 확산시키기 위한 유인책을 얼마나 고민했는지 의문이다.
민심에 아랑곳없이 조국 구하기에만 혈안인 여당, 시대정신을 읽지 못한 채 비관론만 확산시키는 야당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 경제는 냄비 속 개구리 신세를 면키 어렵다.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민본(民本)을 생각하지 않는, 정파꾼들이 득실거리는 3류 정치. 이것이 한국 경제의 최대 리스크다.
<오관철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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