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국은 일제 ‘코끼리표’ 전기밥솥 열풍이었다. 당시 여성들 사이에서 밥맛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일제 밥솥은 부의 상징,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고가인데도 불티나게 팔렸고 일본에 단체로 원정구매를 가 싹쓸이 쇼핑하는 ‘코끼리표 밥솥 사건’이 사회문제가 되기까지 했다.
일본 밥솥이 한국 시장을 장악하였지만 독보적 기술우위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대기업도 포기한 시장에 한 중소기업이 천연곱돌로 만든 속솥과 압력조절부를 뚜껑에 장착한 독창적인 기술의 ‘쿠쿠압력밥솥’을 내놓았다. 출시되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쳤고 많은 중소기업들의 제품 출시와 특허 출원이 이어져 시장 규모도 대폭 커졌다. 지금은 스마트밥솥으로 진화해 원조인 일본에 수출되고 중국과 동남아 사람들이 갖고 싶은 1위 상품이 되었다. 1930년대 중일전쟁 중 일본이 개발해 독보적 기술로 내놓은 상품을 부러워만 하지 않고 독창적인 첨단기술이 집약된 제품을 개발해 ‘넘사벽’ 일본을 넘은 사건이다.
일본이 ‘결국’ 경제전쟁을 일으켰다. 성장하는 한국 중추산업을 좌초시키려는 뻔한 의도의 경제제재는, 54년 전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민간차관과 기술력으로 무장한 일본 기업에 엄청난 새 시장을 만들어준 일과 일맥상통한다. 그 덕분에 일본의 무역흑자는 수교 후 무려 6046억달러에 달하고 지금도 매년 약 250억달러씩 넘겨주고 있다.
우리도 손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수입처 다변화 정책, 2001년 ‘소재·부품기업법’ 제정, 2010년 ‘10대 소재 국산화 프로젝트’ 등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고 오랜 관성으로 비용과 리스크가 큰 기술개발 투자보다 다시 일제에 손댔다. 이번 일본의 경제제재를 놓고도 많은 언론과 재계는 기술격차가 너무 커 일본을 넘을 수 없으니 후일을 도모하자고 말한다.
기업이나 학계에선 한·일 무역역조나 기술종속도 흔한 ‘국제적 분업체계’로 치부한다. 이는 선린으로 상호이익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경제종속을 의도하거나 무기화하려는 상대국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더구나 우리처럼 제조업 기반이 충분한 경우는 더 그렇다. 삼성이 향후 10년 내 133조원을 투자해 시스템반도체 분야 세계 1위를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대로라면 일본만 배부르게 되고 부품·소재산업은 더 낙후될 수밖에 없다.
고도의 기술력이나 지식재산권까지 걸린 부품·소재를 개발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일본의 내심이 드러난 이상 ‘쿠쿠압력밥솥’처럼 최단시간에 국산화하고 기술 확보를 위해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여기에는 정부와 대기업의 역할과 책임성이 중요하다.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이 부품·소재를 개발하거나 국산화해도 수요자인 대기업이 사주지 않아서 사장되고 심지어 회사가 문을 닫기도 한다. 대기업, 부품·소재기업과 정부가 함께 기술개발과 납품 협약을 체결하여 개발과 생산에 전념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줘야 한다. 전략품목을 중심으로 중소·중견기업의 국산 소재·부품을 의무구매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기술혁신과 산업경쟁력을 가로막는 큰 규제는 혁명적으로 혁파해야 한다. 그렇게 규제개혁을 했다는데도 핵심규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올해 SK하이닉스는 최첨단 공장과 연구소가 있는 ‘자연보전권역’ 이천에서 공장 증설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반도체클러스터사업을 통해 그나마 공장에서 가장 가까운 ‘생산관리권역’인 용인 골짜기를 얻었다. 40년 넘은 철통 수도권 규제는 첨단산업 특구화 등 혁신적 재설계가 필요하다. 일본도 저성장 속 산업의 활력을 높이고자 강력한 수도권 공장규제를 철폐한 지 오래다.
일본의 경제제재는 한국 경제가 일본에 위협이 될 만큼 부쩍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사실 선진 경제대국으로 진입하려면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부품·소재산업은 포기할 수 없다. 국민들도 일제·일본여행 불매운동으로 함께 참여하고 응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와 대·중소기업 등 핵심 경제주체들은 뒤떨어진 부품·소재 기술개발을 위한 규제개혁과 지원체계를 구축하고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생태계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속도감 있고 강력하게 펼쳐야 한다.
이런 때 지금 일제강점기 일본의 역할을 미화한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화제라고 한다. 지난날 우리 소재·부품산업의 기술독립 시도를 번번이 무너뜨린 경제주체들의 뿌리 깊은 ‘친일 종속주의’와 맞닿아 있다. 그러기에 ‘일본을 떠나서는 한국 경제가 존립할 수 없다’는 경제사대주의 망령을 벗어버리는 일은 따라잡기 어려운 기술력보다 이번 경제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요체다.
<구재이 | 납세자권리연구소장 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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